‘대한민국에 바이오 클러스터가 없는 곳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국 지자체가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서울 홍릉, 인천 송도, 충북 오송, 대구, 강원 원주 등은 이미 주요 거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경남 양산과 전북까지 클러스터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진짜 클러스터는 없다”는 지적이 지속된다. 클러스터 수는 많지만, 기업과 생태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반감된다.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자체와 업계가 바라보는 기준의 차이이다. 지자체는 공모 선정,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부지 확보 등의 행정적 성과를 기준으로 클러스터 조성이 이뤄졌다고 본다. 반면 업계는 기업이 실제로 성장하고, 기술이전과 신약개발, 글로벌 진출까지 가능해지는 작동 가능한 생태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클러스터 전략의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돼야 할 과제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
2009년 오송이 국가 첨단의료복합단지로 지정된 이후 바이오 클러스터 조성 논의는 16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18개 이상의 바이오 클러스터가 운영 중이며, 앞으로 20개 클러스터로 확대하여 유기적 연계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국립보건원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글로벌 임상시험은 4,667건이 진행되었으며, 이 중 우리나라 점유율은 3.5%으로 전 세계 4위, 서울은 세계 2위 임상도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 중심 클러스터는 활성화와 접근성 측면에서 제한이 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기술사업화 성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며, 기업의 자생력을 키우는 생태계 구축도 미완에 가깝다.
바이오 산업의 특성상 장기적 안목이 필수다. 제조업이나 ICT 산업과는 달리, 바이오 분야는 제품 개발 주기 자체가 길고, 규제 대응 및 기술 검증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신도시 하나를 안정화하는 데도 수십 년이 걸리는 것처럼, 바이오 클러스터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와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클러스터 조성 과정에서 반복된 실패와 지연 사례들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적인 단축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예컨대 ‘앵커 기업 유치’ 같은 접근은 중요하지만, 기업이 해당 지역에서 실제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중소기업 대표와 연구인력이 수도권이나 해외가 아닌 지역에 터를 잡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인프라와 행정적 편의가 전제돼야 하며, 거주·교육·교통 등 생활 여건까지 고려돼야 한다.
명확한 목표 설정과 성과 기준 재정의
바이오 클러스터의 방향성을 설정할 때, 막연한 ‘전주기 지원’보다는 핵심 기능 중심의 구체화가 요구된다.
연구개발 중심인지, 창업지원 중심인지, 임상과 생산이 결합된 연계형 모델인지에 따라 전략은 달라져야 하며, 이에 맞춘 단계별 인프라가 필요하다.
성과의 기준 또한 다양하고 유연하게 정의될 필요가 있다. 바이오 산업의 특성상 제품 승인이나 해외 진출만이 성과는 아니다. 후보물질 확보, 기술이전, 임상 진입 등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이정표로 볼 수 있다. 이를 지자체와 산업계가 함께 공유하고, 작은 성공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확장 가능하게 만드는 기획력이 중요하다.
‘기업이 머무를 이유’가 있는 클러스터를 향하여
앞으로는 완성형 모델의 복제보다는, 지역의 특성과 역량을 반영한 성장형 클러스터 모델로 전환이 필요하다. 바이오 산업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고, 클러스터의 성공은 얼마나 빨리 조성했느냐보다 어떻게 작동하도록 설계했는가에 달려 있다.
기업이 한 자리에 정착하고 지속적으로 투자와 연구개발을 이어갈 수 있으려면, **‘머무를 이유’**를 제공하는 정책과 환경이 함께 구축돼야 한다. 규모나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실제로 작동하는 지원 체계를 일관되게 만들어내는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외형적 확장보다 내실 있는 설계와 운영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