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인생의 마지막 집을 짓는다면

🎼  g1nger 「LAVENDER SKY」,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이번 주 편지엔 가족 이야기만 잔뜩 적었어요. 부산에 내려오기 전에는 어떻게든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는데요. 이제야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같이 살 때는 그렇게 밉더니. 지긋지긋하더니.

구독자 님은 누구와 함께 사시는지 궁금하네요. 같이 사는 사람(들)과 불화는 없으신지. 안전한 거리를 잘 유지하시는지도요.

그럼 셋째 주의 편지 전해봅니다.

🏖 11월 셋째 주의 일 : 면회 

외가와 친가의 할아버지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어요. 두 할머니만 이 세상에 계시지만, 모두 요양병원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이후로는 면회마저 허용되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제 동거인은 휴대폰을 통해 목소리로만 우리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결혼했어요. 할머니는 통화를 할 때마다 거듭 당부했어요. 코로나 때미로 우리는 절~때로 만나면 안 된다. 올 생각하지 마라. 알겠제?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각별한 정을 나눈 것도 아닌데. 얼굴을 보면 데면데면하며 곰살맞지 못한 손녀였는데. '만나면 안 된다'는 말로 전화가 끊어질 때마다 늘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남쪽의 병원에 계셔서, 부산에 있는 동안 꼭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의무감 아닌 의무감이 있었는데요.

드디어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에 부모님까지 부산에 불러 다 함께 면회 일정을 잡았습니다. 병실의 친구들과 나눠 드시라고 과일과 전병을 박스로 사고, 좋아하시는 요플레도 준비했는데. 면회 당일,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어 비대면 면회를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비대면 면회가 뭘까? 대면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떻게 면회가 가능할까?

가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투명한 천막 안으로 방문자들이 자리를 잡으면, 그 천막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해두었더라고요. 할머니는 연신, 여럿이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손 한 번 못 잡아 본다며 아쉬워하셨어요. 할머니 곁에는 만남이 허용된 15분이라는 시간을 재는 직원이 앉아있었습니다.

'야박하다'는 말에 갇혔어요. 바이러스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실감을 했고요. 의료인들의 고통과 수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속상한 마음은 별개의 일. 언제 또 이래 얼굴 보겠나? 할머니의 마지막 대사에 다들 금방 또 찾아오겠다는 씩씩한 말을 건넸지만. 다함께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 11월 셋째 주의 장소 : 을숙도 

할머니를 뵙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온 엄마아빠와 함께 부산의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빠는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터전을 옮겼는데요. 그 덕분에 부산 방문 내내 아빠의 장광설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해운대를 누비던 시절, 달맞이 고개를 넘어 송정으로 가다가 자전거 바퀴의 바람이 빠져 고생한 날, 목욕탕 청소 아르바이트의 고통, 지금은 요트 경기장과 마린시티가 되어버린 놀이터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배를 타고 건너가던 을숙도에서의 무용담이 가장 낭만적이고도 무모하게 느껴졌어요. (자세한 내용은 우리 가족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어요.)

이제는 환갑을 코앞에 둔 세미-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부산. 배 대신 튼튼한 다리를 차로 건너 닿을 수 있는 을숙도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아빠는 당시 얼마나 겁 없고 재미있게 살았는지 한참 떠들며, 을숙도가 얼마나 변했는지도 더불어 이야기하셨어요. 멋지게 지어놓은 카페나 커다란 부산현대미술관 건물을 보고는 '예전엔 갈대밭밖에 없던 곳인데...' 하며 상념에 잠기곤 하셨습니다.

벌써 40~50년 전 일인데 당연하지! 강산이 네다섯 번은 바뀌는 시간인데. 그렇게 말하다보니 늘 친구처럼 함부로 대하는 아빠의 지난 시간이 새삼 커다랗게 다가왔어요. 물로 배를 채우던 시간이 있었던 사람. 높은 건물이라곤 하나도 없던 바닷가 마을에서 고기나 낚던 사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못 본 사이에 더 넓고 휑하게 변해버린 아빠의 정수리를 보면서. 추운 동네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걸 보면서. 아주 따뜻한 모자를 사서 건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KTX를 예약할 때 챙길 선물 목록이 하나 늘었습니다.

📚 11월 셋째 주의 책 : 프리다 람스테드 『인테리어 디자인과 스타일링의 기본』 책사람집, 2021  

오랜만의 실용서. 아직도 수많은 공인중개사 사무소와 전화를 나누며 '집'이라는 주제는 이제 괴로운 느낌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는데요. 집만 알아볼 게 아니라 필요한 가전, 가구와 각종 소품도 서서히 준비해야 할 시기도 다가오고 있어요. 부산에 오며 산 가구라곤 책상과 작은 수납장 두 개가 전부거든요. 오늘의 카페 타임엔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던 인테리어 책을 꺼내 보았습니다. 빌라와 아파트가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실정과 그리 잘 맞는 책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지만, 생각해봄 직한 이야기도 적혀있었어요.

누군가의 추천으로 넷플릭스의 <테이크 원>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어요. 조수미, 악뮤, 임재범 등 유명한 가수들이 출연하는데요. 단 한 곡의 노래로 무대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무대를 만들 것인지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담긴 다큐멘터리예요. 저는 악뮤 편을 보았는데요. 이찬혁이 곧장 말하더라고요. 마지막 무대라면 꼭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고, 만들고 싶은 무대의 모양이 있다고. 커다란 질문을 가능한 한 피해 다니는 저로서는 그런 확신이 신기하고 멋져 보였어요.

책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인생의 마지막 집을 짓는다면 어떤 물건으로 집을 채울 것인가. 물론,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아서 이번 월셋집이 저의 마지막 집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거대하고 극단적인 설정에 얽매이는 건 언제나 괴롭지만... 아무 생각 없이 샀다가, 아무 생각 없이 버리고 싶어지는 쓰레기로만 집을 채우고 싶지는 않다는 확고한 마음만큼은 이 편지에 남겨보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새 집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소품의 종류를 9가지로 나눈 부분을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해당하는 소품을 갖고 있지 않은 카테고리에는 앞으로 무엇을 넣어볼지 상상하기도 했고요.

구독자 님의 공간에는 어떤 물건들이 어떻게 자리하고 있나요? 지금의 집이 살고 싶은 마지막 집의 모양에 가까운가요? (마지막 집과 가까우시다면 도대체 어떻게... 어쩌다가... 그런 집을 만드는 데 성공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내일(11월 17일 목요일)은 아마도, 정말로, 마지막으로 책방 한탸를 돌보는 날이 될 예정이에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편지를 보내면서 소식을 나눠봅니다.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책방에 앉아있을게요. 혹시 구독자 님이 가까이 계신다면, 한 번 들러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요즘은 발목 위로 높게 올라오는 양말을 챙겨 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

2022.11.16.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