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푸른 수건을 의자에 펼쳐 놓기만 하면

🎼  Ephraim Bugumba 「Dirty water」, 2021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한 달 잘 지내셨나요?

막상 쉬고 나니 다시 레터를 시작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다가 이제야 보내게 되었어요. 공지도 겨우 하고요. 이렇게 뉴스레터를 운영하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요. (모두들 부지런히 구독자를 모으고, 보내려는 편지가 어떤 것인지 알리고, 예고하는 일에 바쁘신 듯한데...) 갑자기 레터를 쓰기 시작했던 날처럼, 재개 또한 갑자기 해 봅니다.

오늘은 지난 한 달간의 쉼 가운데 전하고 싶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해요. 불쑥 날아든 편지도 즐겁게 읽어주실 분들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으며. 비 내리는 지난 일요일부터 틈이 나면 책상에 앉아 다시 편지를 적어보았습니다.

이번에도 3개월, 보내보려고요. 6월부터 8월까지. 여름의 일상을 담아볼게요.

🚙 그 사이의 일 : 책방 친구들과 부산 여행

예전에 꾸리던 책방의 절친한 손님들 몇 명이 부산에 놀러 오셨어요! 의욕 넘치는 저와, 퇴근 후 부산으로 달려온 선생님들의 체력이 좋은 합을 내지 못해서 모두 무척 지치셨다는 후문. 코에 염증이 나서 고열과 오한에 시달린 사람과, 입 안에 구멍이 난 사람, 이틀 도합 24시간을 잔 사람, 그리고 온몸을 두들겨 맞은 느낌으로 다음 날 잠에서 깬 저까지. 그야말로 정신없는 여행이었는데요. 그래도, 책방 근처가 아닌 새로운 도시를 함께 걷는 건 무척 신선한 기분이었답니다.

지난 1년 동안, 윗동네에서 저 또는 동거인을 만나러 아랫동네로 내려오는 다양한 손님을 맞이해보았는데요. 손님의 스타일에 따라 여행의 행방은 완전히 달라지곤 해요. 미식가인 친구들과는 맛집을 고르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숙소 위치에 신경을 썼습니다. 부모님이 오실 땐 저녁 식사 전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동선을 만들었는데요. 책방 친구들이 올 때는 함께 책을 보는 코스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기장의 이터널저니, 망미동의 책방 한탸,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까지. 2박 3일 일정에 세 곳의 책 스폿을 넣었는데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책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셨어요. 대신 택시를 탈 때마다 한 분씩 돌아가면서 저와 시간을 보내시고, 선물도 몇 가지 챙겨 주셨죠. 짐만 들고 오기에도 고된 여정이었을 텐데요.

집으로 돌아온 후, 서울행 KTX에 탄 손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았습니다. 그 인사가 제가 책방을 떠날 때 반대로 받았던 인사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떠나는 사람이거나, 배웅하는 사람이 되며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가겠지만. 언제나 우리가 기쁘게 손 흔들며 서로의 안전한 이동을 빌어주는 사이로 남기를 빌었어요. 책방에서 머무른 4년이 끝나자 제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것만 같고, 이따금 영영 백수가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워질 때가 있는데요. 이 사람들을 잃지 않았다는 것. 신간 소식을 나누고, 요즘 읽은 책 이야기를 맘껏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 그런 걸 꼭, 꼭 떠올리려고요.

📍 그 사이의 장소 : 한밤의 요트 위

결혼과 함께 새로운 부모님이 생겼는데요. 두 분을 초대해서 분주했던 주도 있었습니다. 이불과 베갯잇을 새로 빨아 널고, 평소엔 어지러웠던 서재도 정리했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어김없이 대청소의 주간이 되는데요. 이참에 정말 오래된 컴퓨터도 하나 처분했답니다. 컴퓨터 속에 쌓인 데이터를 정리하느라 바쁘기도 했지요. 낡은 데스크톱은 외장하드 하나를 가득 채우고 서재를 장렬히 떠났습니다

금요일에 부모님이 집에 도착하셨어요.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고 해서. 여유로운 날은 토요일 뿐이었어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 외에  여행 코스라고 할 만한 일정으로는 '요트 투어'가 있었는데요. 밤의 요트를 타기 위해 식사 후 택시를 탔지요. 유달리 관광객이 많고 차가 밀리는 주간이라 그런지 기사님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았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현란한 운전 솜씨를 뽐내셨는데요. 덕분에 저는 요트에 탈 때부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흥겨운 한밤의 요트 위, 광안대교와 마린시티는 반짝거리는데 말이죠.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고 자리를 옮기며 배 위에서 1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요트가 출렁거릴 때마다 하느님과 부처님을 찾았어요. 온종일 먹은 음식을 당장에라도 올리려던 몸이 잠시 안정을 찾았을 때, 부모님과 동거인, 그리고 저는 넷이 일렬로 앉아 말없이 반짝이는 밤물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그 시간에 모두 각자의 생각에 깊이 잠겼는데요. 시간이 이렇게 멈췄으면 좋겠다는 찰나의 마음이 들었고요. 어머니는 제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아-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라는 말을 꺼내셨지요. 요트에 타고 처음으로 편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귀가 후 요트 투어의 실상(?)을 들은 동거인은 말수가 적어진 저를 보며 감상에 빠진 줄 알았다고 해요. (자주 그러니까요.) 함께 한 여행은 여느 때처럼 대단한 일 없이 끝났습니다. 저와 동거인은 물론이고, 부산과 서울을 오간 부모님도 피로에 절었겠지요. 모두가 피곤한 여행. 그렇지만 설레는 맘으로 짐을 싸고, 이불 빨래하는 여행. 막상 만나면 별것 없는 시시한 여행. 그런데도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는 여행. 부모님과의 만남은 늘 이런 모양인 것 같습니다.

📚 그 사이의 책 : 아글라야 페터라니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워크룸프레스, 2021

목요일마다 몇몇 사람들과 온라인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데요. 돌아가며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이야기를 나눕니다. 5월엔 제 차례가 돌아와서,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골라보았어요. 작가에 관한 몇 가지 백그라운드와 서커스라는 키워드를 알고 있었고, [제안들] 시리즈가 꽂힌 서가가 예뻐서 한 권씩 모으는 중이기 때문이었는데요. 미처 읽지 못한 이 책을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책은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는데요.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는, 국립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어머니와, 헝가리 출신의 광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후 루마니아를 탈출해 전 세계 서커스단의 초청을 받아 무대에 서며 살아왔다고 해요. 누구보다도 국제적인 유년시절을 보냈고 여러 국가의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있었으나, 사실 그는 15세까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는데요. 홀로 독일어를 공부해 쓴 첫 소설이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라고 해요.

자전적인 경향이 많이 드러나는 소설답게, 루마니아에서 벗어나 서커스단 가족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 언니와 함께 자라는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독서 모임에서 모두들 입을 모아, 읽는 시간 자체가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말했는데요. 과도한 묘사와 긴 설명 대신 모든 것을 생략하고 축소하는 쪽에 가깝지만, 아주 짧은 한 문장에서 그다음의 짧은 문장으로 건너가는 데에도 많은 힘이 필요한 책이었어요. 머리카락이, 눈알이, 목덜미가,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한 페이지에는 한 문장만 덜렁 남겨지기도 하고, 한 단락 뿐이기도 하고, 돌연 백지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책 속의 빈 곳들은 꼭 필요하게 느껴졌어요.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지 않는다면, 마음을 달래지 않는다면 아마 끝까지 읽기 쉽지 않을 거예요. 

영화 속에서만 죽고 싶었던 소녀, 절대로 완전하게 죽고 싶지 않았던 소녀를 그린 작가는 2002년 2월, 취리히 호수에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어찌나 무겁던지. 이 편지를 쓰겠다고 다시 책을 꺼내는 게 어렵게 느껴질 정도의 여운이 남았는데요. 이번에는 죽음이나 불안, 두려움을 말하지 않는 부분을 골라 읽었어요.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의 목록, 푸른 수건, 커피점이 알려주는 행복한 미래,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 엄마에게 집과 식당을 사주고 싶다는 다짐 같은 것만요.

다음에 읽으려고 마련해 둔 [제안들]은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인데요. 구매한 서점에서 결제해주실 때, "앙리 보스코 좋아요!"라며 카드를 건네주셨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기대되는 책은 더 늦게 읽는 요즘. 맛있는 반찬을 가장 마지막에 남겨두는 것처럼 지내는 요즘. 

구독자 님도 6월에 읽을 책을 고르셨는지 궁금합니다.

구독자 님은 편지가 없던 지난 한 달, 어떻게 보내셨나요?

위에 적은 것처럼 제겐 이런저런 이벤트가 있었고. 이벤트 후 금방 회복하지 못하고 침대에 널브러진 채 보낸 시간이 길었어요. (가정의 달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축축 늘어지더라고요. 정말로 찌뿌둥한 기간이었어요. 마음도 몸과 같이 말랑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은 늘 팽팽하고 날이 서서 괴롭기도 했고요.

본격적으로 날이 더워질 것 같더니, 최근엔 하늘이 흐리고 바람도 부네요. 차분하게 새 시즌의 레터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재 에어컨이 (또!) 고장인데요. 수리 기사님이 다음 주에 오시거든요. 돌아오는 주의 편지는 뜨거운 낮에도 시원하게 써보렵니다.

종종 바쁘게 편지를 마무리하던 수요일이 그립기도 했어요.

구독자 님도 그러셨을지 모르겠네요.

그간 건강히, 별일 없으셨기를.

2022.06.08.
부산에서, 성은 드림.

P. S.

편지를 보내지 않는데도, 새로운 구독자가 생기더라고요?

감사하고 환영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