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nertable ✍🏻 일상

💌 Cornertable :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11월 1주차

2022.11.02 | 조회 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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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시간을 잡아두는 구석의 작은 테이블

🎼  럼프 피아노 Lump 「광화문의 밤」,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1월 무사히 잘 시작하셨는지요?

주말 간의 사고로 인한 충격과 상실감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기사와 영상에 갇혀 밤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며 저마다 다른 입장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 '입장'이라는 단어를 오래 굴려봅니다.

오늘부터는 휴대폰을 멀리 두고 잠을 청할 생각입니다.
구독자 님께도 깊은 잠만 가득하기를 빌어요!

저는 한 주 이렇게 보냈습니다.

 


🏖 11월 첫째 주의 일 : 작품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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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단위로 자리한 전국의 문화센터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실력을 갈고닦은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정기적으로 뽐냅니다. 일종의 학예회가 열리는 건데요. 제가 다니는 서예 교실에서도 연말마다 작은 전시회를 열어요. 작년에 바쁘다는 핑계로 참여하지 않았는데요. 서실 다닐 날도 얼마 남지 않아서, 이번 전시회는 '셀프 작별 세레모니'의 일환으로 삼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자기 바빠서 개안켔나?"라며 걱정하는 말을 던지셨지만,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떵떵거렸는데. 크고 작은 일들로 채운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제출일이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10월을 마무리하며 제출하기로 한 작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저는 틈날 때마다 붓글씨를 쓰며 보냈어요.

제출 10분 전, 작품 세 장을 들고 뛰어가 선생님께 검사를 맡고, 인주 가득 묻혀 낙관을 찍고 나니 끝. 선생님께서는 획이 쪼매 약한데 우짜겠노, 하시고는 자리를 뜨셨습니다. 허겁지겁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 허무했는데요. 그래도 유치원 졸업 이후로 처음 학예회 비슷한 것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제겐 이상하게 웃기고(?) 재미있습니다.

학예회가 보호자에게 양육의 기쁨을 선사하는 자리라면, 이제 나를 보호하고 나를 키우는 주 양육자는 나 자신. 내가 양육한 나를, 내가 보며 기뻐하면 되는 걸까... 제가 써 내려간 연약한 획을 보며 느낄 낯선 기쁨을 기다리며 지냅니다.

 


🏡 11월 첫째 주의 장소 : 부산평화영화제 @모퉁이극장

 

 

주말 밤엔 중구에 있는 모퉁이극장에 다녀왔어요. 제13회 부산평화영화제의 평화기획전 선정작인 <피아노 프리즘>을 보기 위해서요. 

 

나는 은퇴한 화가이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며, 요즘에는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있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삶은 흘러간다. 그리고 세월호, 강정마을, 광주 5.18 같은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는 나의 영상에도 항상 피아노가 함께 한다. 피아노를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기획자로부터 단독 공연을 제안 받는다.

피아노 프리즘 / 2021, 한국, 다큐멘터리 / 1시간 31분 

 

원래 화가로 활동하던 오재형 감독은, 그림과의 오랜 별거 끝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아무도 데뷔한 줄 몰랐던 화가의 은퇴'라고 선언하며 숲을 그리는 일을 좋아했던 한 시절을 정리하는데요. 대신 뒤늦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피아노 연주와 영상,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이 영화는 제가 처음으로 본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입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 시각적인 부분을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한 음성 해설(ex.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린 영상이 나옵니다")로 설명해줍니다. 눈을 감은 사람도 화면을 그려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91분간 느낄 수 있어요.

감독님은 말합니다.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 우연히 이런 형식을 알게 된 거고. 개인으로서 사회적 인식을 바꾸지 못해도, 내 작품 안에서는 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배리어프리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 (...) 귀로 보는 영화, 눈으로 듣는 영화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평화영화제라는 이름에 걸맞는 평화로운 시간. 눈앞에서 감독님의 연주를 보고 들을 수 있어 기뻤습니다.

 

📎 SIFF 2021 인터뷰 : http://reversemedia.co.kr/article/590

 


📚 11월 첫째 주의 책 : 정나무 『아플 때마다 글을 썼다』 호밀밭,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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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 과잉의 시절,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가 저를 어떻게 볼지 알고 싶었어요. 나를 다시 보고 싶어할지의 여부가 중요했어요. 나는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일까? 그는 나를 궁금해할까?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한때. 지금은 누군가를 만날 때면 그의 어떤 부분 때문에 나는 그가 또 보고 싶은가, 생각해요.

지난여름부터 저는 수개월 동안 다닌 글방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가장 오래 생각했고요. 우리는 글을 쓰겠다고 모였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빼면 거의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관심사도 전부 달랐습니다. 물론 많은 모임이 그렇지만요. 글방이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사람들. 하지만 글방 덕분에 그런 사람들의 아주 내밀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어요. 사람들은 자주 울었고, 그만큼 많이 웃었어요. 누가 볼까 봐 무서워 일기조차 쓰지 못한다는 이조차도, 그 안에서는 아슬아슬한 마음을 다 보여주었어요.

 

3킬로는 족히 나가는 쇳덩이 같은 노트북은 전원을 켜면 중국집 환풍기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물이 돼버린 노트북이 제대로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곤 윈도우 메모장과 지뢰찾기밖에 없었다. 구식 노트북은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게 돼버린 내 처지와 비슷했다. 마음을 치료하려고 마음먹은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적었다. 할 수 있는 한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려 노력했다. 평생 진실을 피해 도망다녔는데, 이제 이렇게 막판까지 왔는데, 더 이상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나무 ⌜아플 때마다 글을 썼다⌟ 중 (p.92)

 

모임을 이끌어주신 분은 정나무 작가님인데요. 별다른 이유 없이 몸의 곳곳이 고장 나서 무려 7년 동안이나 투병 생활을 해야 했던 시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게 된 과정을 담은 을 쓰셨어요.  책 소개를 보자마자 아주 가까운 사람이 떠올라서,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을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글방 마지막 모임을 앞두고 읽게 됐어요.

글을 읽으며 모든 문장과 생각에서, 내가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의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만큼 솔직하고 투명한 글이었다는 뜻이겠지요.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긴 밤까지 함께하는 동안, 작가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정성이 필요한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어떤 선생님께 강의를 들으며 정성스러운 태도를 배웠다고. 내가 나 자신에게 들인 정성보다, 그분이 나에게 들이는 정성이 더 크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것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그래서 작가님도 글방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정성을 들여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작가님이 선택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일이었어요. 글방에 오는 사람들이 쓰기를 통과해 더 나아지기를 빌었다고요. "약식으로 했습니다."라고 덧붙인 말도 작가님다웠습니다. 타인을 위해 기도해본 일이 언제인지 돌아봤어요. 저는 저를 위한 기도만 수시로 했어요. 차 시동을 걸면서 오늘 죽지 않게 해달라고, 늦잠을 자고 일어나 달리면서 이번 버스를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오늘 밤엔 꿈 안 꾸고 푹 자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정성이라곤 하나도 없었어요. 제 기도 속에는 나의 부족함, 어리석음, 게으름을 수습해달라는 투정뿐이었어요.

글방을 다녀온 후 또 새로운 아침이 열렸는데요. 오늘 아침에는 시간을 내고 조용히 앉아 기도했습니다. 아깝게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과 남아버린 사람들, 그리고 오늘도 글을 쓰며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을 글방 사람들을 생각하면서요. 나무 님의 태도와 나무 님의 글로부터 많은 걸 배웠습니다. 부산을 떠나고 시간이 흘러도 나무 님과 글방 사람들은 이따금 보고 싶어질 것 같아요.

 


 

오늘 편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내일 부산을 떠나 서울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3박 4일간 분주하게 해야 할 일들이 꽉꽉 차 있습니다. 다음 주 편지에는 서울에서의 시간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구독자 님의 좌표는 이 작은 나라 어디에 찍혀 있을지 문득 궁금해져요.

또 한 주.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2022.11.02.
부산에서 성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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