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퀄리티에 있어서 고도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변수입니다.”
윌포드 라마스투스 할아버지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물론 중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변수들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 믿어왔다. 토양이라든가, 일조량이라든가.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어떤 현상들이 커피의 맛과 향을 더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커피 사상을 지배해왔다.
커피에 있어서 어떤 생각들은 단기간에 팩트 체크가 굉장히 어렵다.
커피 자체가 워낙 섬세하고, 과학과 감성, 심리학 같은 모든 요소의 영향을 함께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연구 결과나 말 한마디가 때로는 ‘사상’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커피 선생님들의 이론과 몇 마디 말이 제자들에게는 절대 깨지지 않는 진리가 되어왔던 것처럼.
오히려 커피의 고도는 내게 그 반대편에 있었다.
윌포드 할아버지는 누군가 그의 농장에 방문하면 늘 그 위치의 고도를 보여주곤 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이번 글은 아주 교만했던 내가, 윌포드 라마스투스라는 대가를 만나며 겪게 된 일화이기도 하다.
2019년 즈음, 나는 처음으로 커피 산지를 갔다.
그 당시에는 커피가 자라는 고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와 ‘품종’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당연했다.
과연 어떤 나라가 같은 품종을, 비슷한 떼루아에서, 고도별로 나눠 심어보는 실험을 할 수 있을까?
(현장에서는 변수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고도만 떼어내어 보기 어렵다. 그게 내가 고도를 ‘감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콜롬비아에서는 1800m 정도의 커피들을 맛봤고, 에티오피아에 방문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이 2000m 이상이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2000m가 넘는 고도의 산타 테레사를 방문했으며, 과테말라에서는 하늘 위에 있는 농장 같은 엘 소코로도 갔다. 그곳도 2000m가 넘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숫자는 그리 상징적이지 않아 보였다. 은근히 그 정도 높이의 농장은 많기도 했고, 커피를 키우는 일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처럼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변수와 커피 퀄리티 사이에서 어떤 규칙성도 발견하지 못했고, 커피를 고를 때 고도를 크게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일단 커핑부터 해봐야죠. 맛을 보지 않으면 절대 구매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나는 샘플링 없이는 절대로 커피를 사지 않았다. 그게 내 나름의 신조이기도 했으니까.
2023년, 처음으로 파나마를 방문했다.
그때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게이샤라는 품종은 1700m에서 가장 맛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생긴 이유는 단순했다.
파나마 에스메랄다에 그 정도 고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리오”라고 불리는 에스메랄다의 상징적인 최초의 랏도 1700m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내 글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게이샤는 1500m~1700m 사이에서 가장 좋은 맛을 나타내는 미시기후 품종이다.
아주 까다롭고 섬세한 품종이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샘플링할 커피가 너무 많을 경우에는 (맛을 보지 않고 몇 종을 선별해야 해서 무작위로 샘플링을 해야 하는 상황) 게이샤 품종 카테고리에서는 오히려 더 높은 고도의 샘플을 일부러 배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가!!)
이토록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되면, 그것을 고치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
2023년 파나마에서도 여러 농장을 다니며 좋은 커피를 꽤 구매했고, 마지막으로 엘리다 농장을 방문했다.
윌포드 라마스투스는 굉장히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솔직했고, 누군가에게는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Come, Look.”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 그는 곧바로 다른 것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보니 내가 무엇을 경험했는지조차 또렷이 남지 않았는데, 그가 꼭 멈춰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특정 Lot에 도착해, 그곳의 고도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곳은 토레입니다. 1800m에 위치한 곳이죠.”
“이곳은 아구아카테입니다. 1900m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바이어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고, 매년 듣다 보니 우리는 각 랏의 고도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어마어마한 사건이 생긴다.
엘리다 농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가 탄생한 것이다.
1kg에 1500만 원이 넘는 커피였고, 그 커피의 이름이 “아구아카티요”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 이 모든 일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4년,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를 낙찰 받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
그것만이 우리 블랙로드커피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이 결심은 커피를 사는 일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윌포드에게 부탁했다. 아구아카티요 랏에 직접 가게 해달라고.
나는 1월경, 윌포드의 아들 주니어와 함께 산을 올랐고 아구아카티요에 도달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과정을 돌아보면, 늘 우리가 방문했던 토레와 아구아카테보다 훨씬 더 높은 곳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더 높이 올라갈수록 면적은 좁아졌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커피 나무의 크기도 작았고, 열리는 열매도 훨씬 적었다.
이 모든 것들을 영상으로 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커피를 낙찰 받으려면 대만과 싸워야 했다. 매번 대만 블랙골드커피가 이 커피를 낙찰 받아갔기 때문에, 그 커피를 한국으로 가져오려면 그들보다 훨씬 더 큰 각오가 필요했다. 블랙골드는 대만의 아주 큰 커피 회사였고, 나는 그저 소상공인에 불과한 사람이었기에, 전력투구로 맞붙으면 내가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철저히 조사를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 커피가 이렇게 비싼 걸까?
그때부터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고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어왔던 나에게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엘리다 농장은 2022년, 처음으로 ‘고도’를 주제로 한 프라이빗 옥션을 진행했다. 낮은 고도에서 높은 고도로 갈수록 Lot 사이즈는 작아졌고, 비슷한 구역 안에서도 50m~100m 차이가 커피 맛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토레가 1800m, 아구아카테가 1900m, 부엘타가 1950m. 아구아카티요가 2000m 이상이었다.
그때부터였다.
2000m 이상의 커피가 유독 더 좋아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파나마의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놀라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에스메랄다에는 2000m 이상의 니도라는 커피가 있었고, 아무도 모르는 2200m의 핀토라는 커피도 있었다.
이런 커피들은 에스메랄다의 오랜 고객들만이 구매해갈 수 있는 커피들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격만이 아니다. 높은 고도의 커피는 애초에 ‘시장에 드러나는 방식’ 자체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높은 고도에서 커피는 3가지 특징을 가지게 된다.
- 첫 열매를 맺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보통의 커피는 4년이면 첫 열매가 열리지만, 높은 고도에 심어져 극한의 환경에 놓인 커피 나무는 성장을 쉽게 하지 못한다. 7년이나 9년째에 첫 열매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농장과 환경에 따라 편차가 크다. 다만 ‘높은 고도에서 첫 결실이 늦어지는 경향’은 현장에서 반복해서 확인되는 이야기였다.)
- 생산량이 급감한다. 이 역시 극한의 환경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 열매가 익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핵심 사항 중 하나다. 커피 나무는 꽃이 피고 6개월 뒤에 수확하는 게 보통이라면, 높은 고도에 있는 커피 나무는 열매가 익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이런 3가지 현상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커피의 퀄리티를 더 높게 하는 것과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만든다. 퀄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뒤에 이어서 하도록 하고, 희소성 이야기로 이어가자면 높은 고도에서 자란 커피는 생산량이 적다 보니 가격이 급등하게 된다.
엘리다 농장의 토레 Lot 일반 옥션 랏이 30~100kg 사이라면, 아구아카티요는 옥션 랏 사이즈가 2~5kg 사이였다. 물론 맛도 아구아카티요가 더 좋을 수밖에 없지만, 이런 희소성과 상징성 때문에 커피 가격이 50배 이상 올라가게 된다.
토레의 낙찰 가격이 50만 원 정도라면, 아구아카티요는 1500만 원이 넘어간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농장주가 정한 가격이 아니라, 전 세계 바이어들이 서로 경합해서 낙찰한 가격이다.
시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가치라는 것이다.
사실 고도에 대한 집착과 주요 바이어들이 커피가 자라는 고도의 ‘비밀’을 알아채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발 빠른 바이어들은 각 농장별로 높은 고도의 커피를 선점하기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어떤 외국인이 파나마에서 커피 나무를 2200m에 심어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커피가 첫 수확이 되었고, 인스타그램에 그 사실이 올라왔다.
바이어들은 그 게시물을 보고 커피를 구매하겠다고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기본 가격이 1kg 500만 원이 넘었다.
그런데 결과는 농장주가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커피가 과연 얼마에까지 팔렸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런 커피들은 단순히 한 번 구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미래에도 구매할 수 있는 ‘투자’의 개념도 있다.
(여기서 ‘투자’는 금융상품이 아니라, 관계·우선권·접근성의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더 높은 고도에 커피 나무를 심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높은 땅에 게이샤를 심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살 곳도 만들어야 하고, 관개 시설도 해야 하며, 커피 나무가 얼어죽지 않도록 때로는 하우스를 만들어줘야 하기도 한다.
지금에서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에스메랄다 니도도, 초반에는 커피 나무의 외부를 비닐하우스처럼 만들어 얼어죽지 않도록 보호했다고 한다. 지금은 커피 나무들이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다 보니 하우스를 모두 제거했다.
그런데 이토록 세심한 주의를 몇 년간 해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돈과 노력이 든다.
그런데도 그 커피가 맛있을지 없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으며, 생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을 감당했던 농부들만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바야흐로 파나마 고도의 시대는 2025년, 그 서막이 올랐다. 엘리다가 쌓아올린 고도의 서사는 에스메랄다를 통해 완성되게 된다.
에스메랄다 농장은 전 세계에 게이샤를 처음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게이샤의 근본 농장 에스메랄다는 2004년, 게이샤로 Best of Panama에 충격을 줬고 오랜 시간 1위를 했지만, 최근 성적이 좋지 않았다.
2023년에는 거의 최하위 등수를 기록했다. 그들은 절치부심해 더 높은 고도의 랏을 Best of Panama에 출품했다. 2023년이 1700m의 랏이었다면, 2024년에는 기간테라는 1900m의 랏을 출품했고 결과는 7위였다.
그리고 2025년, 에스메랄다는 2,050m의 니도를 충분한 양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고 Best of Panama에 출품을 했다.
그 결과, 그들은 21년 만에 다시 이 대회에서 1위를 하게 된다. 심지어 그냥 1위가 아니라, 98점이라는 최고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옥션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매번 Best of Panama 1위는 1kg에 1500만 원을 넘어서지 못했었다.
그런데 2025년 에스메랄다 니도는 1kg에 4300만 원이 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직관적으로 전하기 위해 한 잔으로 환산해보면, 원가가 100만 원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다.
“커피 퀄리티에 있어서 고도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변수입니다.”
엘리다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은 대단했다.
상대고도
하지만 여기서, 나와 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도에 대한 중요한 비밀 하나를 더 말하고 싶다. 커피가 자라는 고도는 ‘상대적’이다.
파나마에서 2000m가 엄청나게 높은 고도이고 재배가 어렵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2000m가 똑같은 일교차를 보여주진 않는다.
이건 상식에 가깝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해발고도 50m에 게이샤 나무를 심어도 겨울에 얼어죽을 것이다.
즉, 고도는 상대적이다.
대만의 1400m가 파나마의 1900m와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적도에 가까워질수록 더 높은 고도로 올라가도 덜 추워지기에, 커피 나무가 더 높이에서도 자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높이 올라간다고 능사는 아니다.
조건은 이렇다. 비슷한 토양과 영양분을 가진 조건에서, 더 높은 고도에 커피 나무를 키우는 데 성공한다면 퀄리티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래서 나는 ‘상대고도’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언젠가 꼭 이 산업에서 연구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나라별로 비슷한 일교차를 보이는 고도를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고도의 영향은, 재밌게도 게이샤 품종에서 더 빛을 발한다.
게이샤는 뿌리가 약한 것으로 유명해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는 키우기가 정말 어렵다.
또 낮은 고도로 내려오면 품종 특유의 자스민이나 오렌지 같은 매력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이 품종은 신비롭게도 낮은 온도에 어느 정도 저항성이 있다.
놀랍지 않은가?
게이샤는 태생부터 높은 고도에서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품종이 높은 고도에 자랄 수 있기에 더 맛있어졌는지, 더 맛있기 때문에 높은 고도에서도 자랄 수 있게 사람들이 노력한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게이샤는 현장 체감으로 보아, 많은 아라비카 품종 중에서도 ‘고도를 밀어붙일 수 있는’ 폭이 큰 편이다.
(이 문장은 과학적 순위라기보다, 경험적 결론에 가깝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확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더 높은 고도에서 자란 게이샤 생두가 더 길쭉한 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정확히는 ‘더 높은 고도’라기보다, 생장 기간이 더 길어졌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대만의 한 농부가 나에게 알려준 이야기이니, 맹신하지는 말길.)
실제로 파나마 엘리다 농장에서도 토레(1800m)와 아구아카티요를 비교해보면 유독 아구아카티요(2100m)의 길이가 더 길긴 했다.
게이샤는 태생부터 더 높은 고도에서 자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고도별 퀄리티 차이가 더 크게 나타나는 품종이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런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높은 고도의 커피가 더 좋다고 하는데, 뭐가 더 좋은 걸까?
어차피 나는 구분도 못하는 게 아닐까?
높은 고도의 커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으로 이 분야에서는 내가 나름 경험치가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이토록 파나마 게이샤를 다양하게 맛본 바이어들이 거의 없다.
오래전부터 파나마 게이샤를 맛본 사람들은 있겠지만, 지금처럼 고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이 시기에 모든 지역의 커피를 비교해본 바이어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나는 단언한다.
커피 초보가 와서 맛봐도 퀄리티 차이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
그 증거가 뭔지 아는가?
바로 2025년 Best of Panama의 결과다. 98점이라는 점수, 그 자체가 증거다.
이 점수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심사를 한 40인 중 한 명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비리도 없었고, 이토록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에스메랄다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결과가 발표되고 가장 놀란 것도 심사위원들이었다.
철저히 블라인드로 진행됐다.
98점이 나왔다는 것은, 현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보여주는 결과다. 바이어들은 대체로 올해 최고의 커피, 혹은 내 인생을 바꿀 만한 커피가 나오면 100점을 준다. 반면 한국의 커퍼나 AST들은 100점에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90점도 잘 주지 않는 장면들을 나 역시 많이 봤고, 그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Best of Panama에서 100점을 주는 근거는 와인 업계를 따라간다.
와인 업계에는 로버트 파커라는 유명한 비평가 있고, 그해 최고의 와인에 100점을 주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올해 최고의 커피에 100점을 주지 못하는가?
그래서 “100점이라는 점수를 그해 최고의 커피에는 주자”는 마인드로 심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100점은 절대로 쉽게 나오지 않는다.
100점을 주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특히 Best of Panama의 심사위원들과 바이어들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만 모인다—그 평가 자체로 이미지가 결정되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커피에 100점을 준다면 신뢰는 즉시 무너진다.
그래서 정말 세심하고 깊이 있게 커핑한다. 40~50분을 꽉 채워 모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몇몇 커퍼들은 남은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칼리브레이션 때 다시 맛보기도 한다.
그런 자리에서 30~40명 중 거의 대부분이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현장에서 커핑해보면 아무리 좋은 커피여도, 그 자리에 모인 심사위원들이 쉽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누군가 100점 근처를 주면 반드시 85점을 주는 커퍼도 있다.
그런데 그런 다양성을 모두 깨부수고, 모두에게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는 것은 그 커피가 압도적으로 좋았다는 말도 맞겠지만,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누구나 구분할 만큼 달랐다."
니도는 달랐다. 무엇이 달랐나 하면, “산미와 단맛”의 농축도가 달랐다. |만약 내가 여러분을 딱 1시간만 훈련시켜 그 자리에 데려다주면, 여러분도 바로 구별할 만큼의 차이를 느낄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좋은 커피는 오히려 쉽다.
그래서 지금 시기에, 커피가 자라는 고도는 더 중요해졌다.
게이샤라는 카테고리에서 좋고 나쁨이 애매해지는 순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변별력이 고도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희소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좋다고 느낄 수 있으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지금 2000m에서 자란 파나마 게이샤가 한 잔에 5만 원 안으로 판매되고 있다면, 무조건 마셔보기를 권한다.
몇 년 사이 2000m 이상의 파나마 게이샤는 한 잔에 20만 원이 기본가가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찾는 사람은 많아졌고, 생산량은 쉽게 늘지 않을 테니.
끝으로 정말 알려주기 싫지만, 내가 알고 있는 2000m의 고도를 가지고 있는, 혹은 앞으로 가지게 될 농장들을 알려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높은 고도로 유명한 농장은 아주 드물다.
그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고 수확물을 얻어낸 선견지명이 있는 농장들은 손에 꼽는다. 물론 이제 심어놓는 농장들이 많이 생기겠지만!
2000m의 고도를 가진 농장에 대해서
첫번째는 에스메랄다다. 에스메랄다는 사실 3개의 농장을 가진 그룹 같은 곳이다. 그리고 이곳을 이끄는 피터슨 가문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을 준비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21년 전에도 게이샤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다시 10년 전부터 준비해 “니도”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에스메랄다에는 2000m가 넘는 커피가 무려 4~5개에 가깝게 존재한다. 첫 번째가 2,050m의 니도다. 지금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커피이기에, 아무리 비싸도 눈에 보이면 맛보시길 바란다. 상징성 때문에 앞으로 더 만나기 힘든 커피가 될 테니.
그리고 에스메랄다에서 꼭 마셔봐야 할 커피가 또 있는데, “에덴”이다. 에스메랄다 옥션 최고가이며 희소성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가진 커피다. 생산량이 폭발한 니도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경험하기 어려운 커피이기도 하다. 2025년에는 불과 800g만 세계에 공개되었다. 단, 이 랏은 1970m로 알려져 있다. 내가 직접 방문해 측정했을 때는 중간 정도 위치가 2004m였는데, 에스메랄다는 이런 부분에서 아주 보수적으로 표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또 정말 중요한 커피가 있는데, “핀토”다.
이 커피는 2200m 이상에 위치해 있다. 내가 아마 전 세계에서 유일한 방문자일 텐데, 이제까지 방문했던 농장들 중 가장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새소리만 들리는 아주 조용한 곳이고, 안개가 수시로 꼈다가 사라진다. 그때의 미스터리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솔직히 여기에서 제대로 생산되면 또 다시 니도를 이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전히 생산량은 정말 적다. -> 오늘 저녁 6시에 블랙로드 온라인몰에 출시
마지막이 “마난티알”이다.
이 랏은 에스메랄다의 전통적인 농장 하라미요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에스메랄다에는 3개의 농장이 있다. 니도와 에덴이 있는 까냐스 베르데스, 최초의 게이샤가 있는 하라미요,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엘 벨로. 이곳에 핀토가 있다.
그래서 농장별로 2000m에 게이샤를 심어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네블리나(안개)”라는 랏도 있는데, 에덴과 같은 해에 심었으나 현재 무릎 정도 크기밖에 크지 않아 첫 수확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으로 2000m를 많이 보유한 곳은 엘리다 농장이다. 엘리다도 에스메랄다와 비슷하게 “라마스투스” 패밀리가 이끄는 여러 농장이 있다. 그중 엘리다, 엘 부로, 루이토 룰루가 있다.
앞서 말했던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 “아구아카티요”는(지금은 니도에게 명예를 빼앗겼지만) 2000m부터 2100m까지 위치해 있다. 그래서 작년에는 2100m의 아구아카티요를 따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윌포드 할아버지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비로운 지역에 새로운 농장을 구매하셨고, 아마 2026년 대스타가 될 커피가 “루이토 룰루”이다. 이름부터 귀여운 곳인데, 작년에 딱 30g 정도 생산된 것을 봤다.
그래서 올해는 어느 정도 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거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엘리다의 미래를 담은 “트롬포”라는 랏이 있다.
무려 2200m에서 시작되는 어마어마한 곳에, 지금 관개 시설과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까지 짓고 있으시다.

(트롬포, 2200m)
이 두 농장이 사실상 파나마 게이샤의 양대 산맥이고, 그다음은?
소피아 농장이다. 소피아 농장은 애초에 “더 높은 곳에서 게이샤가 견디는지 테스트해보자”는 이유로 시작된 곳이라, 이미 2000m에서부터 시작한다. 소피아 옥션 랏을 보면 2000m~2200m에 가까운 커피들이 존재한다.
이 높은 고도 때문에 소피아는 거의 매년 Best of Panama에서 Top3에 들어가는 곳이다.
아쉽게도 1위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유명세가 조금 덜할 수 있지만, 구하기는 아주 힘든 농장이다.
그다음은 2025년 다크호스였던 세니소스 농장이다. 덜 알려진 편이지만, 사실 맛으로 압살하는 곳이다. 올해 1900m대의 랏으로 게이샤 워시드와 내추럴 부문 모두 Top8을 기록했다. 니도가 아니었으면 이곳이 1위를 했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세니소스에는 2000m가 넘는 랏이 있고 심지어 2200m 이상도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밤비토, 세로 푼타 지역에 있는 농장이라 떼루아도 완전히 다르다.
감히 예상해보건대, 2026년은 세니소스의 한 해가 될 것이다.
그 뒤를 잇는 곳 중 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농장 “아그리꼴라다”다. 이 농장은 이름이 덜 알려졌을 뿐, 사실상 성공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첫째는 롱보드 농장을 둘러싸는 형태의 떼루아, 둘째는 돈 벤지 농장을 매년 순위권에 올려놓는 마뉴엘이 이곳의 지휘봉을 잡았기 때문이다.
파나마에서 가공뿐 아니라 농장 관리 매니저까지 모든 면에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마뉴엘이다. 그의 손만 거치면 1600m 고도에서 나온 커피조차 Best of Panama Top8 안에 들어가버리니 말을 다했다. 그런데 이 농장에 2000m 이상의 랏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연히 2000m 이상이 있을 줄 알았던 또뚜마스가 생각보다 1800~1900m밖에 없었는데, 이제 커피 나무를 더 심고 있다. 조만간 또뚜마스에서도 2000m 이상의 랏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누구오도 1950m가 최고 높은 랏이었는데, 2000m에도 커피를 심었다고 들었다. 조만간 등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농장이 하나 있다.
블랙문이다.
블랙문에는 1800m 이상의 고도가 없었다. 가공의 장인이었던 헌터 테드만은 그것이 큰 고민이었을 것이고, 올해 밤비토 지역의 한 농장에서 체리를 구매해와 가공을 해봤던 것이다. 그 농장에 2000m 이상의 랏들이 있었는데, 이게 진짜 말도 안 되는 퀄리티를 보여줬다.
예를 들어, 블랙로드 성수점에서 “신의 물방울” 프로젝트로 파나마 최고의 게이샤들을 모아 커피 토너먼트를 했는데,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이 커피가 니도를 이겨버렸다.
그리고 이 커피는 올해 한국 브루어스컵 2위 홍윤수 선수가 사용하기도 했다.
“심비오시스”라는 커피다.
그리고 아마 내년에는 더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 헌터가 그 농장을 올해 사버렸다고 한다.
자, 여기까지.
여러분이 고도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면 다행이면서도, 이 글을 업계 관계자들이 좀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공존한다. 내가 정말 힘들게 알아낸 모든 정보를 망라했기에!
사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커피를 한국에 가져와도 알리는 게 쉽지 않다.
비쌀수록 마진을 적게 남기고 판매하는 한국 로스터들의 실정까지.
조만간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글을 한번 써볼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읽고…
한 가지만 여러분께 부탁드리겠다. 여러분!
올해 블랙로드는 Purelism이라는 큰 시대정신을 만들고 알려가고자 한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전 시대에는 로스팅이나 추출 기술로 커피의 가격이 달라질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기술은 중요하지만, 요즘은 생두라는 ‘그 자체의 가치’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품종, 가공, 떼루아, 그리고 커피가 가진 여러 가지 서사가 현대 커피가 가지는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저희 팀은 모든 기술과 집중을 이것을 전하는 것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퓨어리즘.
그래서 성수에서 전시를 연다.
1~2월 블랙로드 성수점에서, 2000m 커피 4가지를 같은 조건에서 비교해볼 수 있게 준비했다.
커피 도감(다이어리)도 무료로 제공한다.
(핀토, 아그리꼴라, 심비오시스, 소피아옥션랏을 맛볼수 있다)
혹시 이 글이 조금이라도 흥미로웠다면, 그 다음 문장은 성수에서 이어졌으면 한다.
아래 링크에서 예약할 수 있다
(블랙로드 성수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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