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 전 토요일, 전혀 예상치 못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2025년 Breakthrough Prize in Fundamental Physics 를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Breakthrough Prize 는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 등으로 유명한 사업가 Yuri Milner, 구글 창업자 Sergey Brin, 메타 CEO Mark Zuckerberg 등의 후원으로 2013년에 수여를 시작한 상이고, 순수수학, 기초물리, 생명과학, 이렇게 세개의 기초학문 분야에서의 업적을 기념하는 상입니다. 실리콘 밸리의 부로 시작된 현대판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금은 각 3백만 달러로, 노벨상의 약 3배 수준입니다. 한화 약 42억원이네요.
올해 기초 물리 분야의 상은 유럽 핵입자물리 연구소 (CERN) 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 (LHC) 에 위치한 4개의 대형 실험 팀, 즉 ATLAS, CMS, ALICE, LHCb 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Breakthrough Prize 유튜브 채널
글의 서두엔 일부러 다소 모호하게 썼지만, 이 상은 당연히 제 개인만의 업적이 아닙니다. 현대의 과학 연구는 대규모 협력이 아니면 성과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고, 그 중에서도 실험을 위해 가장 큰 돈, 시간, 그리고 인력이 투자되는 분야를 꼽으라면, 저희 입자물리 실험 분야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HC의 네 실험을 다 합치면 올해 총 수상 인원은 13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물리학자 수만 이 정도이고, 함께한 엔지니어들과 테크니션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이 LHC 실험에 투입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ATLAS 와 CMS 실험이 각각 1000개 이상의 논문을 냈고, ALICE 와 LHCb 실험도 각각 500개 이상의 논문을 냈으니, 그 동안의 얼마나 많은 수고가 있었는지, 그 과정을 함께 해온 저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미지 출처: Breakthrough Prize 웹사이트
매일매일을 투덜투덜대며 박사 학위를 힘들게 마무리하고 있는 저에게, 이번 수상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수년의 박사 과정 동안, 나는 무슨 경험을 한 것일까, 돌아보게 됐달까요.
수상 소식을 알게 된 직후, 엄청 기쁘거나 뿌듯한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 마냥 기뻐할 수 없었을까요? 엄청난 업적이고, 정말 감사한 큰 상이지만, 결국 저는 13000분의 1, 그것보다도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분야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수천명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큰 실험 중 작은 일부분을 담당하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거든요.
몇 년 일찍 이 상을 받았더라면, 감상이 좀 달랐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논문을 마무리하기에 급급한 단계지만, 한창 연구를 열심히 하고 학문의 재미가 더 컸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제 삶에, 제 시야의 중심에 오직 기초 과학,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했던 그런 시절이요. 이 상을 그 때 받았더라면, 마냥 기쁘고, 더 뿌듯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만큼 저도 변화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마 시점의 변화, 집중하게 된 대상의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주 못지않게 인간 세상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수천명과 거대한 과학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이런 조직은 어떻게 운영하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참여하는 실험의 스케일에 감탄하다가도, 이걸 만들 수 있었던 선배 과학자들의 원동력, 그니까 지적 호기심과 과학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적 자본,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궁금했고요. 또, 이러한 대형 국제 협력을 위해 필요한 투자가 어떤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결정되는지, 납세자들에게 기초과학의 가치를 어떻게 납득시키고, 사회적 합의에 이를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가만 보면, 물리학 박사 학위를 하면서 물리학보단 인간들의 집단적 의사 결정, 그리고 자본의 역할 같은 주제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웠던 것 같네요.
이번 상에 대해서도, 매해 이렇게 많은 상금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지가 궁금했습니다. 이런 상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이처럼 일부 개인들이 기초 학문에 기부하는 게 효과가 있는지, 이러한 상금은 어디에 쓰이는지, 어떻게 쓰여야 미래 학자들의 양성에 효과적일지 등이요. 그러니까, 이번 수상 소식이 기쁜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건, 지금의 저에게 이 상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데이터, 새로운 연구 대상이기 때문 같습니다.
물리학자로서 축하를 받은 기분보단, 오히려 학계를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더 큰 물음표, 세상의 흐름에 대한 더 큰 연구 주제가 주어진 기분입니다. 지금의 저는 이번 수상을 비롯한 학계의 큰 흐름, 사회와 기초 학문의 관계 같은 게 더 궁금하니까요. 나중에 되돌아보면 이 또한 소중한 경험이고, 기억에 남는 배움의 순간이 되겠죠.
졸업 후에 이런 궁금증들을 어떻게 해결나갈지, 그리고 또 어떤 새로운 궁금증들이 생길지 기대해봅니다.
산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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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산 LAB
P.S. 상금 3백만 달러는 13000명의 수상자에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전액 CERN에 기부되었습니다. 4개 실험에 참여하는 각국의 학생들이 CERN에 와서 연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장학금으로 활용될 계획이라고 합니다. 상금 10원 한푼도 못 받았습니다.
국사봉 공주님
이럴수가!! 당연히 13000명에 나누어지는 줄 알았어요!! 멋진 산하도련님!! 더 큰 연구 주제에 한 발자국 내딛는 하루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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