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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전기도 집어삼키고 있죠. 트럼프의 "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 법안은, 바로 이 AI가 촉발한 전력 위기에 대한 일종의 처방전도 포함하고 있죠. 핵심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무탄소 전력을 '원전 르네상스'를 통해 공급하겠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기후 위기와 전력난을 동시에 해결할 완벽한 계획처럼 보입니다. 이 거창한 계획, 정말 현실성이 있는 걸까요? 어쩌면 저는 이 법안이 AI가 불러온 전력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아주 잘 짜인 정책적 실패작에 가깝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법안은, 단거리 경주에 마라톤 선수를 내보내는 것과 같은, 아주 근본적인 '시간의 불일치'라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죠.
전력 블랙홀과 엇나간 처방전
우선 이야기의 시작은 AI가 만들어내고 있는 상상 초월의 전력 수요 쇼크죠.
이미 여러번 다뤘습니다만,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2030년까지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일본 전체의 전력 소비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장의 주범은 단연 AI죠. 미국에서는 2030년까지, 데이터 처리에 들어가는 전기가 철강, 시멘트, 화학 등 모든 에너지 다소비 제조업을 합친 것보다도 많아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력 수요는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10년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OBBBA라는 처방전은 어떤가요? 이 법안은 기존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가 제공하던 폭넓은 청정에너지 지원책을 대부분 폐지하고, 그 혜택을 원자력에 몰아주는 '선택과 집중'을 택했습니다.
- 태양광/풍력에 대한 사형 선고: 이 법안은 새로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가 세금 혜택을 받으려면, 법안 통과 후 60일 이내에 착공하고, 2028년 말까지 완공해야 한다는,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지금 미국 전역에서 건설을 대기 중인 700GW 규모의 청정에너지 프로젝트 대부분이 이 건설 절벽 때문에 좌초될 위기에 처한 겁니다.
- 원자력에 대한 무한 신뢰: 반면,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는 이 모든 엄격한 조건에서 예외입니다. 2029년 1월 1일 이전에만 착공하면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수년간의 넉넉한 시간을 보장해 주었죠.
정책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변덕스러운 재생에너지 대신, 24시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원자력을 키우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시간의 불일치가 발생합니다. AI는 지금 당장 전기가 필요한데, 정책은 10년, 15년 뒤에나 완성될 해결책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죠.
원전 르네상스의 현실
물론, 원자력이 가진 장점은 분명합니다. 탄소 배출 없는 안정적인 기저부하 전력원이죠. 토지 사용 면적도 재생에너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고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전력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 원자력은 최악의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완공된 보글(Vogtle) 원자력 발전소 3, 4호기의 사례를 보면 현실이 명확해집니다.
- 15년짜리 건설 기간: 이 두 개의 원자로를 짓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15년, 들어간 비용은 당초 예상의 두 배가 넘는 368억 달러였습니다. 이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닙니다. 1970년대 원자력 건설 붐 시기에도, 평균 건설 기간은 7년에서 11년으로 계속 늘어났습니다
- 7년짜리 서류 작업: 더 큰 문제는, 건설 시작 전에 거쳐야 하는 규제의 과정입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인허가를 받는 데만 평균 7년 가까이 걸리고, 그 이전에 각 주 정부의 규제까지 통과해야 합니다. 12개 주에는 여전히 신규 원전 건설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법이 남아있죠
결국 OBBBA가 원자력에 부여한 '2028년 말까지 착공'이라는 시간표는, 이러한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정책적 허구에 가깝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2030년대 중후반에나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폭증하는 AI의 전력 수요를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걸까요?
단거리 스프린터가 현실적일수도
이 정책이 만들어낸 전력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역설적이게도 이 정책이 외면한 태양광과 풍력입니다. 이들이 '지금 당장'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 속도와 경제성: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는 몇 달 만에, 풍력 발전소는 1~2년이면 건설이 가능합니다. 수십 년이 걸리는 원자력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배포 속도죠. 경제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신규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 단가(LCOE)는 MWh당 약 175달러로, 약 40달러 수준인 태양광이나 풍력보다 4배 이상 비쌉니다
- AI와의 시너지: 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약점인 간헐성은, 이제 AI 기술을 통해 해결되고 있습니다. AI가 날씨를 예측해 발전량을 조절하고, 전력망을 최적화하며, 에너지 저장 장치(ESS)의 충방전을 관리하는 거죠. 즉, "AI 때문에 생긴 전력 문제를, AI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아주 흥미로운 시너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이 있을까요?
- 현실적인 경제적 헤지 수단: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재생에너지를 구축하는 것은, 원자력이라는 장기 프로젝트가 가진 엄청난 리스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험'이 됩니다. 보글 발전소 사례에서 보았듯, 원자력 프로젝트는 언제든 예산이 두 배로 뛰고, 완공이 10년씩 늦춰질 수 있는 리스크를 안고 있습니다.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기업 입장에서, 이런 불확실성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저렴하고 예측 가능한 가격으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경영 판단이죠
이미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자신들의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원자력만 기다리는 대신 대규모 재생에너지 구매 계약(PPA)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시장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대가
그럼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죠. 원자력이 AI 전력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원자력은 장기적인 에너지 포트폴리오의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불타는 집에 15년 뒤에 도착할 소방차를 부른 격입니다. OBBBA는 AI가 촉발한 단거리 경주에 가장 느린 마라톤 선수(물론 마라톤 선수 중에는 가장 빠른)를 내보내면서, 정작 가장 빠른 단거리 선수들은 벤치에 앉혀두는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했습니다.
이 정책이 만든 시간의 불일치는 결국 심각한 전력 부족 사태와 전기 요금 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단기적으로 더 많은 화력 발전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장기적인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단기적인 에너지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이 정책의 청구서는, 결국 AI 기업들과 모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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