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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장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낙관론으로 가득합니다. 미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하려는 GENIUS Act가 상원을 통과하고,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자산기본법'을 통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이에따라 미국에선 서클, 한국에선 카카오, 네이버 등이 과열된 주가행보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이 뜨거운 열기와는 정반대로, 세계 금융 시스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기관들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경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이라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과 한국은행이 바로 그 주인공이죠.
대체 한국은행 같은 중앙은행들은 왜 이렇게 스테이블코인을 싫어하는 걸까요? 그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낡은 기관의 몽니일까요, 아니면 시장이 보지 못하는 더 깊고 구조적인 위험을 꿰뚫어 보고 있는 걸까요?
(아 저는 개인적으로 스테이블코인에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중앙은행이 왜 그러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
중앙은행의 트라우마
중앙은행들의 불신이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에만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스스로 증명해온 불안정성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22년,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이었던 테라USD(UST)와 루나의 붕괴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 사건은 시장에 450억 달러의 손실과 함께 끔찍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28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한 해외 토픽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죠. 이런 금융 참사를 겪은 중앙은행이,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화폐를 신뢰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여기서 BIS는 한발 더 나아가, 현재의 스테이블코인이 '왜 건전한 화폐'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세 가지 근본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1. 단일성(Singleness)의 부재
'단일성'이란, 1달러는 발행 주체와 상관없이 어디서든 동일한 1달러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화폐의 기본 원칙입니다. 중앙은행이 이를 보증하기에, 신한은행의 만 원과 국민은행의 만 원은 완벽하게 똑같죠.
-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어땠나요?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 때, 가장 안전하다던 서클(Circle)의 USDC는 준비금 리스크가 부각되며 가격이 87센트까지 폭락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각, 테더(Tether)의 USDT나 다른 스테이블코인은 각기 다른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죠. 이것이 바로 '단일성'이 깨진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서클 달러'와 '테더 달러'는 결코 같은 돈이 아니었고, 투자자들은 발행사의 리스크에 따라 다른 가격표를 매겨야만 했습니다. 이는 화폐가 아닌, 각기 다른 신용도를 가진 '기업 상품권'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탄력성(Elasticity)의 한계:
'탄력성'이란, 경제 상황에 맞춰 통화량이 유연하게 조절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현대 경제는 은행의 '신용 창출'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며 위기에 대응하고 성장을 만들어냅니다.
- 스테이블코인은 100% 준비금을 쌓아둬야 하는 '선불카드'와 같습니다. 은행처럼 새로운 대출을 통해 신용을 창출하고 통화량을 늘리는 '탄력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죠. 만약 경제 시스템 전체가 스테이블코인으로만 돌아간다고 상상해 볼까요? 2008년 금융위기처럼 갑작스러운 유동성 경색이 발생했을 때,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의 흐름이 그냥 멈춰버리는 겁니다.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을 위한 장치가, 역설적으로 경제 전체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구조인 셈입니다.
3. 온전성(Integrity)의 위협
'온전성'이란, 화폐 시스템이 자금 세탁이나 테러 자금 조달 같은 불법 행위를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 이건 더 이상 이론이 아닙니다. 2024년에만 무려 250억에서 320억 달러에 달하는 스테이블코인이 불법적인 주소로 흘러 들어갔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익명의 디지털 지갑을 통해 국경 없이 순식간에 이동하는 스테이블코인의 특성은, 자금 세탁과 제재 회피를 위한 '최적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중앙은행 입장에서 이건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습니다.
BIS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디지털 화폐 정책을 수립해온 한국은행으로서는, 이 문제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겁니다.
한국은행의 딜레마
이러한 근본적인 불신 위에서, 한국은행은 아주 현실적인 '정책적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을 두고 정부와 중앙은행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죠.
현재 새 행정부와 국회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을 통해 국내 기업들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려 하고 있죠. 여기에는 "이대로 가다간 외산 달러 코인에 국내 시장을 모두 뺏길 수 있다"는 강력한 위기감이 깔려있습니다. 즉, '금융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국내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한국은행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창용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 자본 유출의 통로가 될 수 있다"며 외환 관리의 어려움을 여러 차례 토로했고, 금융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속적으로 표명해왔습니다. 테라-루나 사태로 수많은 국민이 피해를 본 악몽도 생생하고요.
결국 정부는 '주권 수호'를 위해 속도를 내자고 하고, 중앙은행은 '안정성'을 위해 속도를 늦추자고 하는, 전형적인 엑셀과 브레이크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첨예한 딜레마 속에서, 한국은행은 수년간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프로젝트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진 못할겁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연구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검증하는 1, 2단계를 거쳐, 마침내 올해 4월에는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일반 국민 10만 명과 7개의 시중은행이 참여하는 대규모 실증 테스트에 돌입하기도 했죠. 이제는 연구실을 벗어나, 실제 상거래 환경에서 CBDC의 실용성과 안정성을 검증하는 단계까지 온 겁니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대체하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가 시급하다는 주장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은행 유상대 부총재(2025.06.24)
Fear
중앙은행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이토록 경계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바로 '스테이블코인 기업 봉건주의'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만약 애플이나 아마존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이 자신들만의 스테이블코인(AAPL달러, AMZN달러)을 발행하고, 그들만의 생태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거대한 '디지털 영지'를 구축한다고 상상해 보시죠. 그 생태계 안에서는 수수료 없는 편리한 결제가 가능하지만, 그 생태계를 벗어나 다른 생태계와 거래하려면 엄청난 수수료나 제약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는 화폐라는 공공재가 사유화되고, 경제가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지배하는 디지털 봉건 영지로 파편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통화 정책을 운용해야 할 중앙은행의 권한은 무력화되고, 그 자리를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 기업이 차지하게 되는 거죠.
결국 중앙은행의 진짜 속내는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기술 자체를 죽이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시스템의 핵심이 되는 것을 막고, 그들을 통제 가능한 주변부에 묶어두려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자신들이 수년간 준비해 온 CBDC와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을 굳건히 세워, 화폐의 안정성과 공공성을 지켜내겠다는 것이죠.
한국은행의 스테이블코인 혐오는, 어쩌면 화폐의 미래를 건 중앙은행의 가장 치열하고 논리적인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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