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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아주 흥미로운 인수합병 소식이 있었습니다. AI 글쓰기 보조 도구의 대명사, 그래머리(Grammarly)가 이메일 클라이언트 슈퍼휴먼(Superhuman)을 인수했다는 뉴스였죠. 표면적으로는 잘나가는 두 회사가 합쳤다는, 단순한 빅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이 사건은 단순히 회사를 합친 것을 넘어,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라는 거인들이 지배하는 생산성 시장에 새로운 '대항마'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습니다. 이건 그래머리가 지난 몇 년간, 특히 새로운 CEO 시시르 메흐로트라(Shishir Mehrotra)의 지휘 아래 그려온 거대한 그림의 마지막 퍼즐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세 회사가 모여
이번 인수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의 '뉴 그래머리'가 어떤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 그래머리 (유통망): 2009년 설립된 그래머리는, 이제 단순한 문법 검사기를 넘어 하루 4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거대한 AI 커뮤니케이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진짜 무기는 50만 개가 넘는 앱과 웹사이트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CEO 시시르가 'AI 슈퍼하이웨이'라고 부르는 압도적인 유통망
- 코다 (두뇌와 작업 공간): 2024년 12월, 그래머리는 문서 협업 도구인 코다(Coda, 노션과 유사합니다)를 인수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수는 사실상 코다의 CEO였던 시시르 메흐로트라가 그래머리 전체의 CEO가 되는, 일종의 전략적 역인수에 가까웠죠. 코다는 '코다 브레인'이라는 기술을 통해 슬랙, 지라 등 800개가 넘는 기업용 앱의 데이터를 연결하고 이해하는 두뇌 역할을 하고, '코다 독스'는 이 모든 지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작업 공간'을 제공합니다
- 슈퍼휴먼 (최전선): 그리고 지난주 2025년 7월, 그래머리는 슈퍼휴먼을 품었습니다. 슈퍼휴먼은 월 30달러짜리 프리미엄 이메일 클라이언트로, 속도와 생산성에 집착하는 소위 '파워 유저'들의 지지를 받고 있죠. 이메일은 지식 노동자가 하루 평균 3시간 이상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업무의 최전선 기지입니다
이 세 조각이 맞춰지자, 비로소 거대한 그림이 드러납니다. 그래머리의 유통망(AI 슈퍼하이웨이)을 통해, 코다의 두뇌(코다 브레인)를 장착한 AI 에이전트가, 슈퍼휴먼이라는 최전선 기지(이메일)에서 사용자를 위해 일하게 되는, 완벽한 시너지 구조가 완성된 겁니다.
빅테크에 대항하는 법
이 새로운 연합체가 겨냥하는 상대는 명확합니다.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AI 전략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플랫폼 요새를 더 높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코파일럿(Copilot)이나 제미나이(Gemini) 같은 강력한 AI를 자사의 오피스, 팀즈, 지메일, 구글 독스 안에 깊숙이 심어서, 사용자들이 자신들의 생태계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거죠.
하지만 시시르 메흐로트라가 이끄는 '뉴 그래머리'는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는 "AI는 기업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사용자가 일하는 곳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머리의 'AI 슈퍼하이웨이'는 특정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사용자가 어떤 앱을 쓰든 그 위에서 작동하는 '중립적인 AI 레이어'를 지향합니다. 소프트웨어 시장의 파편화와 최고의 도구를 골라 쓰는(best-of-breed) 트렌드를 정확히 꿰뚫어 본 접근 방식인거죠.
결국 이 싸움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인가(MS, 구글)" 와 "어떤 환경에서든 작동하는 최고의 AI 비서를 제공할 것인가(그래머리)" 사이의 대결인 셈입니다.
보조에서 자동화로
이번 슈퍼휴먼 인수는 그래머리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과거의 그래머리가 인간의 글쓰기를 돕는 보조 도구였다면, 이제는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는' 자율적인 에이전트로 진화하겠다는 비전을 드러낸 것이죠.
메흐로트라가 꿈꾸는 미래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메일을 열면, AI 에이전트가 이미 받은 편지함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놓고, 중요한 메일에는 내 말투와 상황에 맞는 답장 초안까지 미리 작성해놓는 거죠. 회의를 잡기 위해 여러 번 메일을 주고받을 필요 없이, 내 캘린더와 동료들의 상황을 파악한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최적의 시간을 찾아 약속을 잡아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편리한 기능을 추가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메일이라는, 하루 업무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을 장악함으로써, 사용자의 모든 업무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훨씬 더 큰 그림입니다.
이 원대한 비전이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몇 가지 아주 현실적인 과제들이 놓여는 있습니다.
각기 다른 문화와 기술 스택을 가진, 그리고 무엇보다 각자의 '열성팬'을 보유한 세 개의 회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특히 속도와 미니멀리즘을 생명처럼 여기던 슈퍼휴먼 사용자들이, 그래머리의 기능이 추가되며 제품이 무거워지는 것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모든 자동화의 전제 조건은, AI 에이전트가 우리의 이메일, 문서, 캘린더 등 가장 민감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전례 없는 수준의 데이터 집중을 의미하며, 만에 하나 데이터 유출이나 오용 사태가 발생할 경우, 회사의 존폐를 위협할 수 있는 거대한 리스크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딜이 오랜 기간 계획된 전략이었다는 점, 그래머리, 코다, 슈퍼휴먼 각각이 보유한 충성도 높은 유저층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 과제들은 기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리틀테크의 탄생
그래머리의 슈퍼휴먼 인수는, AI 시대의 생산성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이는 단순히 MS와 구글이라는 두 빅테크에 맞서는 도전이 아닙니다.
시시르 메흐로트라는 그래머리의 유통망, 코다의 두뇌, 그리고 슈퍼휴먼의 최전선 기지를 결합하여, 빅테크들의 요새 안에서 싸우는 대신, 성 밖의 모든 길을 장악하려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들고나왔습니다.
물론, 이 야심 찬 계획이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통합의 난제와 보안이라는 근본적인 리스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겠죠. 하지만 이 도전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MS와 구글의 양강 구도를 위협하는, 작지만 강력한 '리틀테크(Little Tech)'라는 새로운 플레이어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영리한 도전자들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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