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초대장

[두 번째 초대장] 웃음이 귀한 이유

2024.08.05 | 조회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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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살롱

예민함과 섬세함으로 채워지는 하루의 기록. 예민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적습니다.

 

더위로 밤새 깊은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함이 눈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세수와 양치, 최근에는 아침에 하는 찬물 샤워가 좋다는 말에 더위를 씻어내릴 겸 차가운 물로 한 번 휘- 씻어 준다. 간밤에 시트에 달라 붙은 땀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에 금세 개운해진다.

주방으로 가 유산균과 물을 한 잔 마시고 간단히 아침을 챙긴다. 프로틴 한 잔과 과일 몇 조각. 과일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오늘의 옷차림을 고민한다. 옷을 좋아하지만 여름에 흘리는 땀에 옷을 관리하는 게 버거워 쇼핑을 하지 않은 지 벌써 2년 째다. 운 좋게 쇼핑몰 이벤트에 당첨되어 반팔 티셔츠 5벌을 종류별로 받은 것과 원래 갖고 있던 셔츠 몇 벌을 합한 게 이 계절의 모든 옷차림을 책임지고 있다. 1-2년 전만 해도 계절마다 옷을 사서 옷장을 채우기 급급했는데. 그마저도 무기력해진 건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지난 주 화요일에 입었던 착장을 빼든다.

갓생 살아 보겠다고 아침마다 영어 앱에서 나오는 문장을 열심히 되뇌며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누가 보든 말든 혼자 하면 될 일인데 말 한마디 없이 푸석한 얼굴로 나와 같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출근길에 혹여 나의 목소리가 불편할까 목소리를 줄인다.

내 직장은 자취방에서 버스로 10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항상 7:30분에 집에서 나와 40~45분 정도에 버스를 타고 50분 언저리에 회사 근처에 도착한다. 운이 좋으면 환승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3분에서 5분 내지 기다려야 한다. 환승 버스를 타고 3-4 정거장을 더 가면 회사 앞이다. 앱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나면 하루가 시작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색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출근길은 단언컨대 회색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다. 하나를 보더라도 크게 살펴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 내게 서울의 출근길은 너무 삭막하다. 모두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 채 제 앞으로 누가 지나가든, 서로가 장애물처럼 맞닿아 누구 하나 피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거리낌없이 마이웨이를 시전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날씨에 볼멘소리를 이어가던 지난 주의 출근길도 사실 내가 매일을 살아가던 하루 중 하나였다. 막 지나간 장마가 끝났음에 안도하면서도 후덥지근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어떤 여성분의 표정을 우연히 마주하게 됐다. 손에는 커피를 한 잔 들고 시원하게 짓는 웃음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뭐랄까, 일순간 모든 게 낯설고 생경했다. 그저 출근길에 마주친 짤막한 순간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챗바퀴처럼 살아가는 하루에 웃음으로 시작하는 게 언제부터 쉽지 않은 일이 된 걸까. 구태여 모두가 힘드니 내가 힘든 것도 매한가지라며 인상을 팍팍 구기며 살았던 걸까 스스로를 돌아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 행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날의 출근길은 뭔가 좀 달랐다. 듣던 노래를 끄고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말 그대로 15분의 출근길을 천천히 곱씹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래서 사람 구경한다 하는 건가 싶고. 

그때부터 출근길의 이름 모를 동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침묵의 출근길에 에어팟을 빼고 외우던 영어 문장을 잠시 내려두고, 내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걸음걸이가 어떤지, 매번 버스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옷차림에 그날 약속 유무를 예상해 보기도 하고, 횡단보도에 건너편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에 하루의 운을 점쳐 보기도 하면서 작지만 소소한 행복의 발견으로 하루의 첫 단추를 끼우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 행인과의 스침은 불만을 기본값으로 두던 내 행동에 자그마한 변화를 이끌어준 순간이었다. 사실, 아직은 의식하며 행복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소탈하고 작은 행복이 팽배한 출근길이 되었다. 낯설긴 하지만 원래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일상의 찬란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이름 모를 그녀에게 존경과 충만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오늘의 순간 / 2019 부산의 여름.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by 고슴도치 살롱
오늘의 순간 / 2019 부산의 여름.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 by 고슴도치 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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