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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옮겨 적은 글입니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사랑해." 그는 그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말은 "나도 너를 사랑해"를 줄인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글을 읽고 떠오른 제 메모도 있었습니다.
넘버링을 하듯 내게 건네진 나를 좋아하는 이유들, 그런 것들에 실은 감응하지 않는다. 내게 덕지덕지 붙은 것들, 내가 습득한 지식과 재주 따위에 주어진 감탄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어떠하고 저쩌하고. 그렇게 갖다붙인 수식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분석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저 내 심장을 원해 하길 바란다.
나는 아무 표정 없이 '우울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나만큼이나 곪아버린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우울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결국 너를 통해 사랑을 짐작한다. 결국. 그러니까, 종국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1월 20일은 코로나19 감염환자가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날인데요. 지난 1월 20일로 벌써 코로나 5년이 되었습니다. 시기에 맞춰 관련 기사를 써주신 기자님이 계셨어요. 저는 사실 너무 놀랍고 묘한 마음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외조부를 잃은 저로서는 더 이상 코로나 희생자를 기억해주리라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기자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감사한 답장을 받았습니다. 허락을 구하지 못해 기자님의 답장을 공개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지막 부분 정도만 이곳에 담아보려 합니다. (기자님, 괜찮겠지요?)
일에 대한 회의감과 고민이 가득한 요즈음, 저 역시 한순간 벅찼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한식)
돌아가신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길에 허수경의 시선집을 읽는다.
"나이를 곱절씩 먹어도 나는 계집애이고 뒷산 벌거숭이 고향산은 내 동무일 뿐 세상은 꿈이 아니고" (남강시편 1)
할아버지의 잃어버리지 않은 시절들을 산 자들은 잊어버리지 않고.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랑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달빛)
다시 만나기까지 몇 광년을 감내하고. "세상의 비밀을 목도한 사람이 감내해야만 하는 형벌", 그것은 하얗게 쌓인 눈밭에 겁을 내는 것. 세계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꿈은 사랑과 같이 스며들어 자유로 다시 선다" (새)
시인으로부터 "투명한 바통"을 넘겨받듯 할아버지로부터 나는 무엇을 받잡았나. 당신이 떠나 "연약한 세계 단위"로 묶인 "우리"들은 고작 한 사람 사라지자 유약해지는 그런 산 자들.
구두를 신은 어린 날의 이츠키가 빙판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결빙의 잠자리. 깰 수 없고 속을 만져볼 수 없는 얼음. 그 단절 아래 한 인간의 신체도와 같은 모양으로 잠자리는 누워있고. 순간 상실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병원과 질병을 둘러싼 소동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아들을 살리지 못했던 노인은 무너져 가는 집을 떠나지 못한다.⠀
히로코와 아키바는 그가 죽은 설산 앞에 선다. 잘 지내십니까. 나는 잘 지냅니다. 털어버리고자 도착했지만 통곡하는 순간 알게 되는 것은 애도의 비종결.⠀
소년을 회상하는 사이. 그들에 배어있는 상실은 곳곳을 비집고 나온다. 남은 자들은 서로 엉겨붙고 마주보며 울고 화를 내고 소리친다. 그렇게 편지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이 말해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고. 남은 자들이 주고 받은 편지에는 러브레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월 1일에 '러브레터'를 봤었습니다. 대여섯 번 보는 동안 '첫사랑' 영화인 줄로만 알았던 제 인생 영화가 애도에 관한 영화인 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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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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