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9일, 서른일곱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5.02.09 | 조회 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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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편지 쓰는 일이 좋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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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D로서 제가 요즘 하는 생각들을 전해요. 얼마 전에 폐차장에 취재를 다녀왔어요. 차들의 장례식장이라 불리는 곳이죠. 최근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입원했던 것 때문일까, 현장에 가니 마치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재미가 넘쳤고 오랜만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점이 되어준 취재였습니다. 그럼 또 만나요.

 

지난주 목요일의 취재는 춥고 즐거웠고 빨리 끝나길 바랬고 느린듯 했지만 생각보다 금방 끝났고. 그러한 날이었다. 김포에 오래 머무르는 것도 내 인생 처음이었을 거다. 아마. 취재 덕에 서울 토박이이자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여기저기 다닐 수 있고. 좋다. 다음 금요일에 또 부산에 가는데 기대되는 일이다.

 

꽤 괜찮은 날이었는데 무언가 휘발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몇 자 적어본다.

 

기억 남는 장면 하나.

취재원과의 첫 만남은 늘 어색하다. 나는 폐차장 사장실에 vj선배와 들어갔고 명함을 주고 받았다. 최대한의 어색함을 감춘다. 어색하지 않은 척. 나는 무언가 한 마디를 뱉어보았다. 사실 머릿속엔 오늘 취재를 잘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는데, 그냥 날이 춥다든가 하는 그런 한 마디 말이다. 그렇게 사회생활 자아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기억 남는 장면 둘.

그렇게 취재를 시작한다. 레코딩 버튼이 눌리고. 택시에서 인터뷰를 시작한다. 필요한 내용을 따는 것부터 수월하다. 오늘 무언가 조짐이 좋다. 그런 기분이다. 출연자에게 전화가 온다. 이것까지 그대로 찍어주세요.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리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모두 담는다. 성공이다. vj선배도 신나 한다. 시작이 좋네. 그렇게 말한다.

잠시 뒤 나는 화면 안에 있다. 찬 바람에 얼굴도 얼어붙었는데. 이번에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내어본다. 속으로 생각한다. 서울로 돌아가 내 자리에서 푸티지들을 열어봤을 때, 지금 내 얼굴은 어떨까, 표정은 썩은 미소일까, 말은 잘 하고 있을까. 그래도 이전 촬영보단 나은 것 같은데.

 

기억 남는 장면 셋.

폐차장엔 차를 압축하는 압축기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끌어내고 싶은 대답이 있다. 차를 버리러 오는 분들은 많이 아쉬워하시겠어요. 사장님은 말해달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해주신다. 여기가 그래서 차들의 장례식장이라고 불립니다. 어떤 가족들은 다같이 평생 타던 차가 압축되는 것까지 보고 가셨어요. 속으로 외친다. 아주 조금 성공이다. 내가 원하던 장면은 완성되어가고 있을까.

 

기억 남는 장면 넷.

점심을 먹는다. 직원분들은 내가 이전에 만든 영상을 이야기하신다. 일부러 기존 영상까지 보고 와주시는 분들은 드물다. 고맙다. 스스로를 낮추어 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던 나는 '피디님' 소리조차 어색해진다. 그렇게 밥을 먹고, 밥값을 계산하고, 다시 어색하게 폐차장으로 향한다.

 

기억 남는 장면 다섯.

작두로 번호판을 자르는 청년이 있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되셨나요? 어쩌다요? 그냥 아는 사람 소개로... 뭘 어쩌다... 아뿔싸. 질문이 잘못됐다. 나의 '어쩌다'에 함축돼있던 그 복잡스런 전제가 부끄러워진다. 서둘러 화제부터 전환한다. 이 일을 할 때 뭐가 그럼 가장 즐거워요? 그래도 취재가 스무 번에 가까워지니 질문하는 과정에서 당황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모자람은 질문을 모두 마친 후에도 남는다. '어쩌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떠할 것이리라 전제하고 접근해버린 습관에서 나온 오판. 실은 현장직을 평범의 밖에 두는 프레임 자체도 조심스러웠던 터라, 나는 이 취재의 시선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기억 남는 장면 여섯.

나는 끌어내고 싶다. 무엇을? 그들에게서 애틋함을, 먹먹함을, 그들이 삶에서 짧게나마 쌓아온 연륜을, 인간미를. 솔직함이 취재에서 제일 중요한 태도라고 믿게 된 나는 인터뷰 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시작해본다. 제가 어제 다큐들을 보고 왔는데요. 폐차장 다큐였거든요. 거기서 폐차장 직원분들은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사실 여기 직원분들에겐 그 이야기가 해당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결의 이야기들을 끌어내고 싶어서요. 제가 어떤 질문을 드리면 좋을까요? 뻔뻔하게 나아간다. 대놓고 질문지를 적어달라고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접근은 좋았다. 사장님과 직원분들은 진지하게 고민해주었고,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을 얻었다. 그리고 오래 일하고 싶어졌다.

 

이 일은, 재미있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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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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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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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함의 프로필 이미지

    선함

    0
    4 months 전

    저도 14년된 차를 폐차하면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20대와 30대를 함께한 나의 브릴리언트한 카렌스... 폐차장에서 어떤 단어를 찾으실지 궁금하네요.

    ㄴ 답글
  • 쉼의 프로필 이미지

    0
    4 months 전

    질문을 직접 받는 방법도 좋네요. 오히려 자신이 받고 싶은 생각이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누군가는 모를 세상의 기록들을 담고, 기억들을 공유해줘서 고마워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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