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소리에 응답하는 법

[보는 습관] 제4호

2022.10.13 | 조회 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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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저물

덩어리들이 쓰고, 춤추고, 새겨지는 곳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어김없이 목요일이 돌아왔습니다. 곧 주말이 온다는 뜻이니, 조금만 더 힘내자구요! 😊 

<보는 습관>을 쓰는 경험은 저에게도 새롭습니다. 요즘은 대부분 예전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다시 돌아보고 있는데요. 때로는 (아니 대개는) 별 생각 없이 찍었던 사진을 재해석 하는 과정이 과거의 저를 다시 마주하게 합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진심으로 사진을 찍었던 건 아니지만, 글에서 뭐라도 말하고 싶어 애써 의미를 찾다 보니 나의 시선도 조금 더 다채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치만 외장하드를 뒤져가며 쓸만한 사진을 뒤적거리는 일 말고, 카메라를 직접 들고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사진을 찍는 일도 같이 시도해보면 좋겠네요. 이건 게으른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

 

 

오늘은 '풍경'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풍경 (2020)
풍경 (2020)

이 풍경... 은 아니고요. 😅 우리가 보통 '풍경'사진 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없는 자연과 사물의 배치로 이루어진 사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풍경 사진을 볼 때 종종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냐구요? 대체 이걸 '어떻게' 봐야할지 막막해서입니다. 산과 들과 바다와 하늘, 건물과 집들을 보며 무엇을 감각해야하는 걸까요? 광활함에서 숭고의 아름다움을 느껴야할지, 다양한 색감과 색다른 구도에서 심미적 즐거움을 느껴야할지,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감탄과 경이를 느껴야할지요? 사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뭔가... 비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 (2020)
나무 (2020)

저는 세상의 가려진 곳 드러나지 않은 곳을 섬세하게 살피는 것, 그런 '보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개 어떤 사건, 이미지든 하나의 '텍스트'로, 의미를 읽어내는 것으로 보곤 합니다. 사진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 보고 싶어하죠.

사람이 나오는 사진, 사람의 손길이 닿은 사진은 비교적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풍경 사진을 볼 때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색감, 구도... 사람이나 그 사진을 보고 있는 관찰자와는 완전히 분리된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들만이 나열될 뿐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풍경 사진을 그냥 즐기면 됐지, 머리 아프게 여기서도 정치 타령이나 하고 있으려고? 풍경 사진에 정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라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절반쯤은 맞는 이야기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자연'은 '사람'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매일의 관계 속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 존재들이죠. 하지만 왜 우리는 자연을 볼 때 그런 것들을 볼 수 없나요? 물론 종종 자연이 '태고의 신비'나 아름다움과 같은 이미지로, 아니면 정반대로 파괴되고 침해된 무언가로 그려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도 자연은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시된 존재로 느껴집니다. 

스티브 울가(Steve Woolgar)는, 「과학의 사회적 연구 경향의 테크놀로지로의 전환 The Turn to Technology in Social Studies of Science」(1991)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텍스트로서의 기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술을 기능을 가진 인공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 위에서 얻게 되는 기능-의미를 '독해'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술이 인간과 분리된 '대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 텍스트로서의 기술을 쓰고 독해하는 과정에 '관찰자'나 '사용자'의 행위가 항상 개입하며, 이들의 관계망, 네트워크 속에서 비로소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는 『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Bodily Natures: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2010)에서 횡단-신체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몸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고, 몸들이 그 연결을 통해 횡단한다고 말입니다.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것이, 그저 대상으로만 이해되던 자연 이미지, 그리고 기껏해야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분된 존재로 주고 받는 영향이 있다고 파악했던 구도를 넘어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분자 수준이든, 개인 수준이든, 집단이나 사회 수준이든 자연과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있다는 것, 특히 단순히 인간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재현하고, 의미화하고, 개조하는 방법을 넘어, '물질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 때의 물질은 고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도 변화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한 이 말들, 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뱉은 것이라 당연히 어려운 말들을 정리해보면, 자연-인간은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기능이 존재하며,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물질적인 차원에서 변화하고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나무 (2020)
나무 (2020)

제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공들여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풍경사진에 무언가 비어있다는 저의 감각이, 단순히 '정치를 끌어들이자'라는 제안이 아니라는 것, 그런 교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인간의 구분을 유지한 채, 그저 '인간'의 정치를 덧붙이기만 하면 비어있는 게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간이 관계하는 방식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색감, 구도, 감탄과 경이와 관련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혹은 이를 넘어서, 우리의 몸들에 자연이 각인되고 기입되는 다른 방식, 거꾸로 우리의 몸들이 자연의 몸들에 각인되고 기입되는 다른 방식, 나아가 우리-자연의 몸들이 다른 몸들에 또다시 각인되고 기입되는 다른 방식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벚꽃 (2020)
벚꽃 (2020)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벚꽃 풍경 사진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읽어내고, 또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나요?

예쁘다, 색감이 부드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뜻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진다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이려면, 앞에 깔려있는 좌판을 보며 유추할 수 있는 상업과 노동에 대해, 그것과 벚꽃의 대비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벚꽃나무를 심도록 선택한 시 당국의 동기와, 그것이 이 공간을 봄마다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드는 효과, 그 효과를 매출 상승에 활용하려는 상인, 그러나 현실의 계급, 젠더 관계 등에 의해 미와 놀이가 차별적으로 분배될 가능성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인간의 관계, 그것의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물질성에 주목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올해도 벚꽃이 필 수 있었다는 것, 기후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의 작용과, 지금의 날씨에 반응하는 나무의 작용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또 드러나지 않았지만 벚꽃의 꽃가루가 지나는 행인에게 흡입되어 폐에 자리하게 된다거나, 좌판에서의 말과 거래는 누군가에게 벚꽃 향기의 감각으로 기억된다거나, 나무와 벚꽃 역시 상인과 도보객이 만드는 바람과 길의 변화에 조금 더 일찍 꽃을 떨어트리거나 뿌리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주변 생태계-이웃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고, 확장되고 이동하는 정원이 나타나며, 그에 대한 관리가 어려워 나무를 뽑는 결정이 주민과 시 당국에 의해 내려졌다가,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를 제가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사건이 유명해지고, 정원은 그대로 유지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사실 이 모든 과정이 곧 확장된 의미의 '정치'라고 생각하는데요. 제도 정치나 정치공학에서 쓰이는 좁은 의미의 '정치'는 물론 아니고, 인간 중심적인 의미의 '정치'도 아니지만, 관계 안의 다양한 요소들이 얽히며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나 그곳에도 결국 규범과 분배, 윤리의 문제가 존재할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라고 하고 싶습니다.  

 

바다 (2020)
바다 (2020)

무슨 소설을 쓰고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 사실 저도 많이 헷갈리고, 분석의 방식과 요소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연을 '본질적, 고정적 특성'이 있는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자, 생물학, 개인, 집단, 사회 등이 변화하는 방식, 그것들 사이의 경유 방식을 이해할 틀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렇대도 단순히 '인간'의 행위와 작동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자연-인간의 관계성을 다시 상상하며 자연을 읽어낼 수 있는 최대한 다양한 경우를 떠올려보는 것, 우리는 사실 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그 연결을 상상해야만, 이미 이뤄지고 있는 그러한 연결에서의 위임, 불평등, 소외에 대한 책임에 응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의 풍경 사진을 볼 때, 초록이 우거진 한없이 맑고 티없는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보는 습관을 가져보자고 제안합니다. 

 

 

정원 (2020)
정원 (2020)

 

장미 (2020)
장미 (2020)

 

물론 많은 것이 그대로 공백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단번에 해결되는 설명도, 연결도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자연-인간의 연결 방식은 많은 경우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을 거예요. 위 두 사진을 보고 나서, 정원의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불러모아 잔디가 더 밟히도록 해 정원을 바꿔놓는다거나, 우거진 장미가 담장을 넘는 학교의 학생들을 막아 점점 더 그 범위를 넓혀간다거나, 이를 찍은 사진가가 자신의 학창시절의 의미를 덧붙여 작품으로 만들고 관광객을 끌여들여 장미는 시들고 장미와 사진가의 추억을 그린 벽화만이 남는다거나 하는 상상을 말하는 건 터무니없이 들리니까요. 😧

그렇지만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상상이, 우리의 시선과 일상을 더 즐겁고 다채롭게 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소외되고 가려지던 인간-비인간의 존재들이 다시 전면에 드러나고, 공존과 돌봄과 같은 대안적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지도요. 그 거창한 일들이, 우리의 보는 습관에서 출발할 거라고 생각해보자구요! 그리하여 풍경이 내는 소리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고, 또 우리가 기꺼이 그 풍경이 되는 순간을 기대해보고 싶어요. 

 

오늘은 너무 추상적이고 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많이 적어버렸습니다. 나중에 눈물의 정정을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대로 가보겠습니다. 너무 무책임한 것 같네요... ㅎㅎ 그래도 아무쪼록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되었으면, 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구독자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남은 하루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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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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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경

    1
    about 2 year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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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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