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10년대] 준비물 (1)
시대라는 말이 민망해진 시대에서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 드디어 첫 글을 보내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막상 글을 시작하려고 보니, 그 전에 하고 넘어가야할 말이 더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정체를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자 준비물을 몇 개 챙겨보려 합니다. 첫 번째 준비물은 바로 '시대'입니다. <나의 2010년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시대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앞으로의 이야기의 틀이 잡힐 것 같아요. 조금은 두서없을 수 있지만, 오늘은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좀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숫자에 갇힌 시대
사실 시대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하는 식으로 역사책에서 쓰는 분류나, 인류가 엄청난 경제적/기술적 성취를 이뤄낸 시대는 식으로 언론에서 하는 말을 종종 접하는 정도겠죠. 그럴 때 시대는 '2022'와 같은 숫자에 고정된 특정 시기로 존재합니다. 서기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정해진 시간의 흐름 속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이는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이런 생각 안에서는 시대에 대한 고민이, 이제까지 걸어온 길 위에 돌 하나를 올리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다소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인류'라는 주인공이 파란만장한 서사를 거쳐 지금 이곳에 왔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온전히 나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에요.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 보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일까? 정통한 하나의 서사가 있을까? 우리는 정말 '앞으로' 가고 있을까? 내 의지대로 다음 일을 결정할 수 있을까? 모두 물음표가 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대도, 실제 사회에서 시대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는 건 권력이나 자본을 가진 대단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 느껴집니다. (물론 이 역사의 '주인공'의 자리에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앞선 질문이 모두 해결되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 고정된 시대들을 거쳐 가장 발달한 '지금'에 있는 것이라면, 과거의 시대는 기껏해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삼는 자원 정도 외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앞으로의 시대를 여는 것은 곧 미래를 '예측' 해야 하는 어렵고 전문적인 일이니, 트렌드나 미래 예측을 하는 전문가들이 신경쓰면 될 일입니다.
연결되고 의미 짓고 춤추는 시대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시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숫자에 묶인 시대를 풀어주고,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 '시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사실 따져보면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어느 정도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합니다. 모두가 동시에 공유하는 큰 사건이나, 비슷한 제도나 문화 내에서 경험하는 패턴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또 자신의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조건에 따라, 혹은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친구 집단, 제도, 기관에 따라 마주하는 경험 자체가 다르기도 하고, 비슷한 경험이라도 느끼는 감정이 전혀 다르기도 합니다.
그럼 과연 무엇이 이 시대를 규정할 수 있을까요? 다른 것들 속에서도 '그나마' 공통으로 공유되는 어떤 것을 잘 포착하면, 그것이 시대일까요? 양적으로 가장 많이 측정되는 것이 곧 그 시대를 보여주는 것일까요? 하지만 같은 사건도 모두 다르게 이해한다면 그것이 정말 '공유'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공유되도록 만든 힘이나 원인도 있을 테니, 굳이 따지면 바로 그 원인이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경험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더 부각되고, 더 잘 보여진 결과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는 단순히 숫자 속에 갇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 불러 내야하는, 세상의 다양한 존재들과 연결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일어난 적도 없던 사실을 누군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연결은 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시대라는 이름 안에 존재하는 혼란한 시공간 속에, 인간이나 비인간, 문화와 제도, 권력 같은 존재들이 관계 속에서 갖는 특징과 대면해야 하고, 그 만남 앞에서 나의 시선, 나의 몸짓,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의미 짓고, 춤추며 시간 안에 나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그럼 더 이상 '시대'라는, 특정 시기를 일컫는 듯한 고정적이고 총체적인 개념을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시대라는 이름을 간직하려 합니다. 시대라는 것이 고정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에도 매번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해도, 특정한 주체가 특정한 상황에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경우'에는 분명 '시대'라는 이름의 시공간이 갖는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무언가가 변화한다고 지속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변화하면서 지속하는' 방식을 찾아야 하겠지만요.
잘은 모르지만 크게는 헤겔적인 것이 아니라 벤야민적인 역사를 고민하겠다는, 단선적인 진보의 서사가 아니라 끝없이 과거를 현재화하는 과정 속에 시대가 창출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에 기입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상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냐구요? 시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내가 위치한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살면서 무엇을 중요시하는가?하는 일종의 세계관인데, 저로서는 시대를 이렇게 다른 식으로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체, 관계, 변화'에 주목하겠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쓰일 <나의 2010년대>에서는, "그 때 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대적인 사건이었다는 식이 아니라, "그 때의 그 일이 지금의 나와 주변에게 어떤 의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누구에 의해 이런 시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식으로 서술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가까운 과거에 대한 막무가내의 에세이지만, 실은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2022년의 2010년대'에 대한 편파적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전에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르크스 같은' 사람을 인용하는 저는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그건 다음 시간에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그런데 참 말을 멋있게 하죠? 원래 이런 멋있는 말을 약간 비틀면 절반 정도는 멋있어지니까 저도 한 번 해보려고요 😉) 하지만 세계는 변혁의 '대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이 아닌 것을 포함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고, 연결된 세계에 - 물질적이고 동시에 담론적인 - 의미를 '기입'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한 것이 세계에, 그 무언가를 기입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것은 완전히 의지적이지도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지나치게 염세적이지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않은 관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시대라는 것이 아주 커다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바로 내 안에, 아니 나와 연결된 나의 관계 속에 매번 존재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시대
저는 다시 감히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각자가 만들어내는 의미, 이를 위한 시선과 몸짓, 그러한 기입이 '마주치는 곳'에 '우리'가 있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오늘 구독자님의 시대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내 시선에 함께하는 나와 주변의 것들은 어디에 있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만드나요? 누군가가 저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찬찬히 곱씹으며 그에 대답하기 위해 앞으로 이 글을 더 써 나가보겠습니다. 저의 이상한 글들을 보면서, 구독자님도 자신만의 시대를 만들어가시길 바라요. 그리고 그 시대가 저의 시대와 언젠가 어디에서 만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을게요.
여기까지, 첫 번째 준비물은 '시대'였습니다. 아직 출발하기 전에 앞으로 두 가지 정도 준비물을 더 챙겨야할 거 같아요. (준비만 하다 끝나는 건 아닌가 몰라 🤣) 그건 마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고, 건강하고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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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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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저물
네 다음 주에 찾아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치만 현생에 치이다보니 제가 연재할 수 있는 최대의 주기일 거 같습니다 🥲 그래도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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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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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저물
저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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