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장례식

스승이 제자에게 건네주는 것이 이전과 같지 않다.

2022.07.10 | 조회 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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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에비던스

~ 쥐돌이들은 구석에서 댄스를 시작했다. 죄의 쥐돌이, 죄돌이 ~

판데믹 이후 장례업체가 온라인 장례식을 전문화하고, 조문객에게 제공되는 링크를 중간에 가로채 온라인 장례식에 관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가 있다.(물론, 아니다. 하지만?) 온라인 장례식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1. 다양한 장소와 차이가 있는 기기들이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감각과 인식의 노이즈들과(노이즈 애도, 노이즈 반가움, 노이즈 이별)

2. 온라인 장례식의 절차, 예를들어 탄식의 순번 등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노이즈들의 중첩이다.(그러나 이것은 탄식의 선형적 관습에 대한 어떤 폭로의 장면이다.)

 이 두가지 요소는 장래에는 매끄럽게 해결될 것으로, 기기와 네트워크의 규격이 통일될 것이기에, 하나는 온라인 장례식의 세세한 절차가 발명되고 교육될것이기에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 온라인 장례식 정립의 시기에 우리는 표면적으로 최적화될 어떤 핵심들을 관찰할 수 있다.

 현대의 온라인 일상에서 대부분의 노이즈는 음소거와 화면대체로 통제되는데, 이러한 통제의 권한이 개개인들에게 주어지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발언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은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오프라인 상황에서 발언하는 것 보다 좀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 예를들어, 오프라인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탄식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온라인에서는 플랫폼이나 기기의 상태와 관련하여 특정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즉 발화의 의도와 과정과 결과가 변질된다. 마이크, 통신상황, 음소거 버튼의 유무, 장례 장소의 상황 등 많은 요소들 때문에 서사는 형식으로 쉽게 불평하면서(?) 대체된다. 이때 당연히 조문의 형식은 인스타 라이브의 이모티콘이나 슬퍼요, 유감이에요 버튼으로 대체되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들로 인해 발생하는 거리감 만이 온라인 장례식을 가상현실이나 게임과 다를바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노이즈없이 리얼 하고 매끄러운 온라인 장례식을 체험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의도되는 바(누가?말인가?내색하지는 않지만 우리의.의무적인.)는 기존의 장례식의 진중함과 감정의 혼돈이, 그리고 어느정도의 침잠이 오프라인 상황처럼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다. 즉 몰입이다. 그런데, 오히려 오프라인이 아님에도 몰입된다면, 그러한 기이함이 오히려 몰입에서 부터 우리의 주의를 다시 외부로 향하게 할 것이다. 그러한 외부로 향함은 온라인 장례식 그리고 장례식 자체에 대한 사고로 향하게 한다. 특히, 온라인 장례식에서는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관을 활짝 열어둔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낮은 해상도는 불온한 레트로 호러 게임의 한 장면을 목도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무엇인가가 일어나려고 한다.

보통 장례식으로부터 되살아나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단순히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로 인해 생명을 다시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종식되는 감각 전반을 방문객들과 친지들 사이로 분산하여 구조로 부터 개인은 짐을 덜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로는, 다소 잘모르겠지만 이러한 정의의 구조를 받아들이고, 모든 상황을 장례식으로 생각한다면, 혹은 모든 미디어의 온라인 장례식적인 특성을 규정해보기로 한다면, 그러한 감상의 기저에는 갑자기 시체가 일어날 것이라는 시네마틱한 환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온라인 장례식들 사이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 감각은 다소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띈다. 왜냐면 그것은 단지 환상이며 특히 스크린의 환상이기에 환상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부활과 살육(만약 죽은자에게 분노가 남아있다면)의 현장에 우리는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장례식===미디어에서는 죽음(어떤 것의 발견과 그것이 초래하는 부패)와 장례식(그것에 대한 애도의 형식 혹은 형식적 애도), 두 양상의 절차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되살아나는 이미지와 기대로 가득찬 장례식에서 어떠한 부활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체가 일어나는 환상만을 간직한 채 진정한 부활은 영원히 연기된다.

부활은 장례식 이후에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제 장례식장은 영원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장례식은 끝나지 않는다. 온라인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시체를 만질수도 없고, 시체가 부활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시체가 두려워 불을 지르거나 부셔버리려는 것도 할 수 없다.

세가지 화면이 있는데, 하나는 거울, 하나는 온라인장례식, 하나는 완전한 어둠이다.

인간의 내부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 대립은 귀, 눈동자, 입, 코 등을 통해서 시시각각 벌어진다. 호흡하는 기관, 소리의 무덤, 그리고 영혼의 쇼윈도우를 통해서. 온라인 장례식은 너무나도 탁월해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것의 편리함과 완성도, 불완전함의 예측가능한 보완점들만 따져본다해도. 온라인 장례식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관에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온라인 장례식에서 우리는 모두 조문객이자 동시에 이미 죽은자들이다.

온라인 장례식에서는 대량학살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장례식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감정과 고통들의 다소 보편적 분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산을 타고 올라서 관을 정상으로 데려간다(그렇게 긴 길은 아니다.) 관은 일종의 스크린이 되어서 그 안에 덜걱거리며 들어있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잘익은 죽음의 모순적 형태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산을 오르며 경사를 통해 중력이 재분배 되면서, 관의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무게중심의 이동이, 죽음의 신체성에 대한 감촉과 본능적인 부인의 욕망이 다시금 우리를 관통하게 된다. 무덤에 먼저 내려가 관을 받으려는 어떤 장인의 양쪽 흙벽을 단단히 누르고 선 당당한 두 다리는 다소 의심스럽다. 이것은 또다른 건축 현장이다. 그러나, 그래서 곧 포크레인의 강력한 신체에 우리는 혼이 팔린다. 포크레인의 팔은 동시에 다리이기도 한데, 그들은 팔로 땅을 짚은채로 바퀴궤도의 방향축을 변경한다. 하지만 진정한 볼거리, 격렬함은, 구덩이에 내려놓은 관을 흙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다시 관을 들고 모두 함께 산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일어날 것이다. ("고인이 망가져보일수도 있죠")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이것은 분배되서 소거되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왠지 모르게 고양된 감정으로 흙을 모두 파헤쳐서,(이것은 관을 내려놓고 한명씩 흙을 흩뿌렸던 장면과 대비된다.) 관을 들고, 엉성하게 다같이 인간지네처럼 매달려서, 경사진 산 언덕을 넘어지듯 내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바닥에 다다르면 관을 갑자기 땅바닥에 던져놓고, 부서지는 나무판자들 사이로 고인이 뭉개진 채로 흩뿌려지던 말던, 다같이 고성방가하며 울부짖으며 흥분해서, 두서없이 떠들면서, 미친 눈을 하고, 그러나 서로를 절대로 쳐다보지는 않으면서, 제갈길을 가고, 가서 그 이후로는 평생 그렇게 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죽은자를 파헤쳐서 되살릴수 없어서 그들 자신을 되살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행위가 보편적인 문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전통적 기독적, 아무튼 무슨 관습적 제사는 계속해서 길바닥에서(노제), 산에서(언덕 바로 밑에서), 구덩이(가족묘) 앞에서 일어난다. 매 제사의 순간에서, 갑자기 도로의 차나 포크레인이 이들을 모두 때려 갈아 죽이는 상상을 하게된다.(이것은 필연적이며 집단적 차원의 죽음 충동일텐데, 절차적이고 효율적인 행정 방식으로, 가시화된 근원적 공포를 가속주의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다. 지금도 많은 장례식 방문자와 친지들은 대량학살의 상상을 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라도 막대기를 들고 보이는대로 족족 때려죽여야 마땅해보인다. 즉 장례식은 본디 집단적 부활의 가능성에 대한 제안이였다. 그러나 온라인 장례식에서는 대량학살을 상상하기 힘들다. 대규모 부활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면 대량학살이라도 일어나야 할 텐데, 어쨌든 모두 폐지되었다.

아이가 죽으면 마음에 묻는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무덤이 작다는 뜻이다. 애기들은 갈갈이 분쇄되서 땅바닥 어딘가에 도매 무덤에 방사능 폐기물처럼 박아넣거나 뿌리거나 한다. (혹은 그냥 길거리에 던져질 것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별로 다뤄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만큼 건덕지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따라서 때로는 봉기의 횃불이 되기도 한다. 사소하기 때문에. 그만큼 어이가 없어서, 애기들도 죽다니. 하는 것일 것이다. 장례식-온라인 장례식적인 대장정을 구성하기에는 그만큼 아이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다. 따라서 어떤 권위들?힘들이 자연스럽게 거절되고, 사람들은 너털웃음을 짓는다. 따라서 아이들을 먼저 죄다 죽이거나 죄다 부활시키거나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차려보니 우리 앞에는 무한한 온라인장례식 세계가 놓여있다. 우리는,(아이들은) 이미 온라인장례식의 세계에서, 부활할 수 없는 죽은자들로써 확립되었다. 꼭 인터넷이니 핸드폰이니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어떤 파시즘적 생각들이 꿈꾸었던, 도래했어야 할 온라인장례식적인 세계가 구체적인 형태들로, 다층적인 레이어로 노이즈를 최적화하며 이름들을 가진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온라인 장례식으로 굳어진 세계를 피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관을 다시 파내서 땅에 내동댕이 치고 울면서 빠르게 벌레처럼 흩어지는 것을 꿈꿀 수 없고, 뭉개진 고인이 화를 내면서 모두를 쫓아가는 상상을 욕망 할 수 없다.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중간 장막이 제공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 무게중심이 변하는 순간과 그것이 초래하는 충동적이고 반발적인 에너지(기)를 전달받을 수 없다. 그것은 온라인이여서는 아니고, 전달받는 순서의 체계, 시간의 순서가 플랫폼적인 보편 시간(정지한 시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이동하는, 하나의 유산, 죽은자의 몸의 무게. 여전히 움직인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7부 스틸볼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죠니는 쓰러져 죽어가는 말의 시체가 찬 마지막 발차기를 통해, 최후의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7부 스틸볼런의 마지막 장면에서, 죠니는 쓰러져 죽어가는 말의 시체가 찬 마지막 발차기를 통해, 최후의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흐름속에서 그것들(기)는 다른 형태로 변화되서, 전달되고 계승되어서, 이리저리, 우리들 사이로, 얼굴들 사이로 이동하겠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런 힘들에 대해 꿈을 꾸고, 찾고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자주 눈을 감게 되고 있다. 그리고 촉각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있다. 힘들은 힘껏 던져진채로 뚜렷한 매질없이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어서 우리도 공중에 불안정하게 던져저나가야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이들의 몸을 증오하고 사랑하고 훔치고 싶고 훔쳐서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그것의 무게를 질질 끌고다니면서 느끼고, 그래서 그 무게를 고스란히 우리 안으로 들여와서, 그의 부활을 유일한 악몽처럼 두려워하고 동시에 원하고, 그리고 우리 이미 죽은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이 것들을 할수가 없어서 애처롭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원망하고 짜증내고 다소 받아들이면서.. 이미 죽은 채로 부활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점차 편안하게 모든 것들로부터 공제되고 있는데, 되도록 그러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쉽고 빠른것은, 역시 온라인 장례식의 링크를 가로채는 것, 그것이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모든 노이즈들과 마찬가지로 취급되기로 하면서,(전략적으로도, 법적 조치를 피하기 위해서) 서로의 온라인 장례식에 갑작스럽게 등장하기로 하자.. 분위기를 망치는 말 몇마디, 우스꽝 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려는 양심의 작용에 의해, 침잠하거나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힐수도 없을 것이다.(이것은 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놓은 폐기물같은, 온라인 장례식에 남아있는 허공의, 죽음의 유산인 무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부활시키고 또 죽으려는 것이다.

 

-참고자료-

" ... 사람을 만드는 데에는 두명이 사용되지만, 죽음에는 한명이면 족하다. 그리고 이 세계도 그렇게 끝날 것이다. ... 

만약 시간 속으로 그저 흩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좋을 것이다. 아주 좋을 거야. 시간 속으로 그저 흩어질 수 있다면. ...

이상한 방 안에서, 당신은 잠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야만 한다. 그리고 너가 잠을 위해 비어있기 전에, 너는 무언가다. 그리고 모두 비워졌을 때, 너는 아니다. 그리고 잠으로 충만할 때, 너는 였던 적 없다. ...

…"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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