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누워있는 자

2022.07.09 | 조회 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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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에비던스

~ 쥐돌이들은 구석에서 댄스를 시작했다. 죄의 쥐돌이, 죄돌이 ~

“이 사람은 누워만 있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일어나지 않죠.”

그러나… 그렇다고 누워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기소침하다. 다년의 간호와 요양보호의 결말에 대해 다소 분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의기소침하다. 그들은 돌봄의 폭풍 속에 굴러다니다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고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들은 소리를 지른다. “악” 그것은 의외로 굉장히 자유롭다. 그들은 자기가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종양처럼 붙어버린 다른사람의 앓는 일과의 관계에 대해 이제는 말한다. 또는 다시 무너진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편에서 샌드맨은 모래처럼 부서지는 노동자-도둑인 자신을, 그것을 잡으려는 시도에서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만 재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인, 병약한 딸의 사진이 담긴 목걸이를 통해 계속해서 부서지고 구성된다.  샌드맨-마르코 플린트flint(부싯돌)은 말 그대로 돌멩이같이 생긴 작자로, 그가 다른 빌런-노동자들과 차별되는 부분은 그는 유약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왜냐면 그는 빨리 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모든 사람을 쏴죽이고 있는대로 훔칠 준비가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아크의 초기나 후기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용서해줘..” 그는 말하지만, 그것은 뉘우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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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자들, 의기소침한 자들은 다년간의 간호와 요양보호(심지어, 수십년에도 이른다.) 속에서, 그들이 속해있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끝이 가까워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임박했으며,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으며, 메시아가 가까워져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들은 영원한 간호 속에서 그들이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의기소침하게 누워있는 시간대와 똑똑히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자신이 길거리에 나가서 진리를 설파하는 광인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자적인 노동에의 연결에 대해 벌써부터 의기소침하고, 따라서 미래의 의기소침과 연결된다. 그들은 자신의 메시아적인 경향과 역사의 시작에 대해 피로함을 느낀다. 누워있는 자들은,, 자신이 간호하는 자의 침대에, 그 좁은 침대에 비집고 들어가 눕는다. 그들은 자신이 간호하는자의 장기와 뼈들과 욕창생긴 특이한 피부를 더이상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고, 자신의 몸, 특히 이리저리 다루고 싶을 때 애정을 담아 움직이는 부위들 처럼 뒤적거린다. 그 행위들에는 확실히 죽음과 가깝지만 그것을 뛰어넘는(무슨 뜻인가?) 태도가 담겨있다. 그들은 작은 배에 타서 누워있다. 한 침대(죽음)에 두명이 누워있는 것이다. 병원 침대는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한명은 죽어가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왜 이사람은 비좁은 침대에 궂이 아득바득 들어가서 병자를 괴롭히는가? 왜 그는 누우려고 하는가??

 

(잘못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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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침대에 두명 째로 누워있는 그는 더이상 집도 몸도 없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죽어가는 사람의 침대는 새로운 요람이요 학교다. 그는 그곳에 자신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더이상 누워있는 사람과(이 사람에게는 다소 어처구니 없겠지만) 자신의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도 이제 누워있는 사람이 되어 앞으로의 모든 인생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손도 습진과 피로로 물러진 것이다. 먼저 누워있는 사람의 무기력함에 대해 자신은 어쩔수 없게 되었다는 식으로, 다른 모든 억압의 형태들에 대해 그것들은 이제 자신이 할일을 다하고 떠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는 태도로 그는 이 잔인한 돌봄도 아니고 뭣도 아닌 것을 즐긴다. 모든 불이 꺼지고 출처를 모르는 불빛들 사이에서 그들은 그저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본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 욕구들, 기원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시간 자체의 본질과 다른 모든 본질들에 대해서 말하고 오직 그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마치 그들에게 그런 역할이 영원히 주어진 것만 같이.  

오로지 이상한 것은 아픈일이다!! 그들은 이상한 일, 아픔이 도래한 일이 너무나도 기이해서 논의한다. 왜 아픈것일까? 이 때 이들은 그들 자신에게는 진지하고 슬프지 않다. 아픈 것 으로부터만 우리는 이상한 불멸성의 감각을 획득한다. 우리는 오로지 그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전파하려고 애쓴다. 이 감각은 따져보면 그 구조의 전제(기적) 때문에 아직도 문명 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간호하고 있어요,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어요, 라는 말들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화자의 노동자적인 것의 경중을 잰다. 만약 그들이 힘없는 엄마라면 그들은.. 하지만. 아픈이들이 아이들이라면.. 하지만. 이런식이다. 아픈 일들은 세상의 다른 모든 유쾌한, 폭력에 대한 인간의 만성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대처의 도구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잡아먹히는 것들은 자연스럽다. 부서지는 것은 합당하다. 하지만.. 아픈 일은. 그것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있어서, 손쉽게도 재수없는 양보의 기술, 저런, 아프시군요(스루)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아프다는 것은 그러니까 죽는 일이다. 죽는 일의 기술이 잘 보전되지 않아서 그럴것이지만, 사실은 의기소침함이 아직 충분히 상품화되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의기소침이 충분히 상품화 된 세계 속에서는 개인화도 충분히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죽음에 대해 특별히 말하지 않는다..아직 의기소침한 것이 힘이 없는 것일 때, 결재서류 속에서 이름이 없는 것일 때, 의기소침함은 궁극적인 구멍으로 작동하고 있다. 의기소침한 사람들은 원망하고 힐난한다. 왜냐면 시간이 되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누워있는 자들이 걸어서 방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모든 고통들이 보상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단순히 어떤 사람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이유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냥, 그냥 화가 난다. 더이상 누가 고통받았는지도 상관이 없다. 더이상 그들이 누구인지도 내가 누구의 침대에 둘로서 누워서 그들이 되었는지도 상관이 없다. 더이상 누구의 침대와 방에서 도망쳐나와 그들을 원망하고 그리워하고 욕망했는지도 상관이 없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행진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다지 크게 외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의기소침해서 따라서 행진한다. 그들은 볼멘소리로 말하고 시선을 회피한다. 그들은 그냥 누워있다. 그들은 더이상 쉴 수 없다. 그들은 영원히 의기소침 하는 노동을 하도록 부여받았고 그들도 알고 있다. 그저 누워서 의기소침하는 것 만으로 그들은 굉장히 피곤하고 하루종일 노동한다.  

노동자는 승리했다!!!!!! 그들은 노동의 도구와 산물을 모두 갖고 있고 필요하지도 않다. 그들의 의기소침이 그들의 모든 잉여생산물중 가장 귀중한 것이고 누워있음이 그들의 공장이다. 사람들은 경악하고 그것들을 모두 게걸스럽게 먹게 될 수 밖에 없어서 경악한다!! 그들은 광장에 모여서 수근거린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숨기려는 표정으로. 그것들은 계속 증식하고 불어난다. 결국 죽어버린자의 무덤에서 그들이 누웠던 침대로, 그리고 누워있는 노동자에서 광장의 사람들로 피의 연결고리가 바로크풍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으로 이어져있다. 이 생산라인은 견고하다. 그것이 뿌리내리는 시장의 의기소침에 취약한 정도에 따라서. 왜 의기소침에 취약한가? 그것은 의기소침의 복잡함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시장이 죽은자들의 죽고싶지 않아하거나 죽고 싶음에 대해 열심히 상품화 하거나 제련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심층적으로 생각해보면, 시장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바는, 시장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우리의 힘이, 우리의 노동자적인 뜨거운 가슴과 역사가 의기소침이 구성하는 패배와 탄식이 아닌 어떤 무언가가 우리에게 불멸성을 제공한다고 넌지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암흑의 핵심은 의기소침이 배양하는 불멸성의 명확함과는 달리 우리에게 벅참을 주지않는다. 

우리가 한번 누워있게 되면, 우리는 안다. 시간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따라서 건물들도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한 침대에서 둘이고, 그리고 동일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눕힐 때 까지 쉬지않고 노동(탄식, 의기소침, 방기, 투덜거림, 원망)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보람차고 흔들리지 않는 연대이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죽인 그 아픈 사람들 때문에 그것을 안다!!!! 그것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알고 우리가 노동한다. 사람이 꾸역꾸역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직 분명했던 것은 그것 하나 뿐이다. 아픈 사람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그는 불명확한 말들을 지껄인다. 그의 눈에서 빛이 사라져간다. 그의 장기에 연결해 놓은 관이 역류한다. 입에서는 무언가가 흐른다. 산소호흡기에 거품이 생긴다. 그는 지금 바로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눕힌다. 그의 열기와 땀이 영원히 식지 않을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신화적이고 강렬하다. 그가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혀.. 우리는 그를 사실은 간호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역사에서나 병자는 신성으로 다른 자들은 그것을 보좌하는 것으로 각자의 임무를 다했다. 어느 누군가는 버리고 죽이고 도망치는 것으로 그렇게 했다. 모든 남아있는 자들은 누울때마다 눕혀지는 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눈이 빛난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유일하고 신성한, 광적으로 격정적인 의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모든 지루하고(시간이 없기에) 고통스러운, 영원히 돌아가게 되는 기다림의 순간들 속에서 다져진 것이다. 원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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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i " Vae "? Cui " Eheu "? Cui rixae? Cui querela? Cui sine causa vulnera? Cui suffusio oculorum?

누가 비탄에 젖어 있느냐? 누가 애통해하느냐? 누가 싸움질하였느냐? 누가 원망하느냐? 누가 까닭 없이 상처를 입었느냐? 누가 슬픔에 잠긴 눈을 하고 있느냐? (불가타 성경, 잠언, 23장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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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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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 3 years 전

    "정말 맛있고, 또 방문할 예정입니다. 주인이 친절하고, 농밀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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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돌이들은 구석에서 댄스를 시작했다. 죄의 쥐돌이, 죄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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