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확 식었어. 단번에, 신기할 정도로.”
N이 울분을 터트렸다.
“‘잘진애시죠?’라더라. 이게 말이 돼냐? 어떻게 대학까지 다니는 지성인이 그럴 수 있지?”
L은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맨날 ‘일부러’를 ‘일부로’로 쓰잖아.’
L이 세상에서 오이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면, 맞춤법을 틀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물리학 전공이면서도, 국문과에 다니는 N이나 문창과 친구들보다도 빈틈없는 맞춤법을 구사하곤 했다.
L은 토렌토나 P2P 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가거나, 왓챠나 넷플릭스 같은 정식 플랫폼을 쓰거나, 구하기 힘든 영화는 DVD를 샀다. 불법 다운로드는 안 된다는 윤리적인 자각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엉성한 번역과 오류투성이의 맞춤법에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L은 희한한 맞춤법 파괴 사례를 페이스북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관가할 수 없다’는 문장을 봤는데, 도저히 간과할 수 없다”, “‘기간이 말료됐다’는 글을 보고 인생 만료시키고 싶어졌다”는 식으로 몇 번 드립을 쳤는데, 사람들 반응이 좋아서 아예 시리즈처럼 굳어졌다. 이제는 다들 기대하기에 이르렀고, 요즘에는 친구들의 제보도 자주 들어왔다. 그들은 ‘가오캥이’나 ‘계념의로’ 따위의 황망한 사례를 보고 괴로워하는 L의 모습에 내심 즐거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연쇄 맞춤법 파괴범’에 대해 수집하면서 L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전에도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어느 순간 확신하게 됐는데, ‘연쇄 맞춤법 파괴범’의 절대 다수가 남자라는 사실이다. 여자들의 경우 틀리는 빈도가 확연히 낮기도 했고, N처럼 ‘않/안’과 ‘되/돼’를 헷갈리는 사소한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가 틀렸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리고, 곧바로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명확했다.
N의 과 선배인 K는 스물다섯 살의 복학생이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퍽 괜찮은 남자였다. 그는 상당히 훌륭한 비주얼에 딱히 모나지 않은 인간성, 놀라운 성적 매력의 모태솔로였다. 다만 성적 매력에 비해 성적 능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그건 그 단계까지 겪어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K의 주변에는 인력에 끌리는 위성처럼 늘 여자들이 맴돌았지만, 막상 그와 썸을 타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물수제비처럼 튕겨나가곤 했다.
L은 N 때문에 우연히 K와 술자리에서 합석한 적이 있었는데, 몇 마디 나눠보고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착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둔감한 남자였다. L은 그날 K가 자신에게서 내내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느꼈고, 다음날 N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이후 K는 N과 L이 만날 때마다 끼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L이 몇 번이나 거절의 시그널을 보냈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L이 자신을 피하는 걸 알고 K는 전략을 바꾸었는지, 뜬금없는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쪽지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L은 머리가 아파왔다. SNS는 왜 알려줬을까. 단지 귀찮다거나, 맥락 없고 재미 없는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내.”
“요즘 왠지 모르게 좀 우울하내.”
“어제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느낌이 참 좋내.”
L은 그때마다 답을 보냈다. 사실은 씹어버리고 싶었는데, 성격상 읽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일단 읽고 나면 답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격 탓이었다.
“네, 날씨가 좋네요.”
“저도 요즘 왠지 모르게 좀 우울하네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저도 좋네요.”
학기말이 되자, K는 방학이 되기 전에 L에게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완곡하게 거절해도 들어 먹힐 것 같지 않아서, L은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또 모르잖아. 최소한 스타일은 훌륭하니까. 얘기해보면 장점 비슷한 거라도 찾아내게 될지.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기말고사까지 끝나고 K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으면서, 어떻게든 지적, 정서적 접점을 찾아보려 애쓰던 L은, 결국 그가 사고와 언어능력은 있지만 소통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어여쁜 생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K와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 L은 별 소득 없이 진을 빼놓는 만남 뒤에 찾아오는 특유의 현타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즈음에 메시지가 날아왔다.
“밥 먹으면서 꼭 말하려고 했는데 못했내. 나 너 전부터 좋아했어.”
L은 버스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놈의 맞춤법 고쳐줄 기회는 영영 사라졌구나. 사실 그동안 고작 한 글자씩 거슬렸을 뿐인데, 어째서 그라는 사람 자체가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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