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가 진행 중이다. 아이오와 주의 예비선거에서 트럼프가 압승을 했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은 트럼프의 핵심 정치적 구호로 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애국심을 호소하는 한편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국수주의적 구호이다. 이를 열열하게 지지하는 미국인들 중에 트럼프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조하고, 지난 대선의 트럼프 패배 이후에 미 의사당에 난입했던 사람들이 이 “MAGA 그룹”에 속해서 중도나 진보에서는 과격한 트럼프 지지자들을 지칭한다.
한국의 작금의 정치 상황과 대비해보면 MAGA 지지자들은 “태극기 부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과격한 행동은 물론, 과격한 언행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고, 하원 의원 중에서도 지금까지의 정치적 금도를 무시하는 과격하고 날 선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트럼프와 경쟁하는 후보 중에 누구도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세력인 MAGA 지지자들을 공격하거나 중도나 독립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이 “막말 하는” 과격 그룹과 공화당이 이별해야 한다고 하는 공화당 후보자는 찾아볼 수 없다.
한편 한국에서는 보수당이 막말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다. 진보 세력이 만든 “막말” 구도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정치란 ‘말로 하는 전쟁’이다 보니 어느 나라나 언어의 지배를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정치적 언어의 구도를 장악하려는 말의 전쟁은 치열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을 앞세운 미국이나 유럽에서 진보 진영에 보수적 견해에 대한 공격이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보수권은 진보 세력의 언어의 정치 문화적 장악 시도를 수용해서 ‘막말을 하는 사람들은 보수당에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진보의 정치적 구도에 말려들지 않는다. 거꾸로 PC주의 또는 워크이즘(Woke-ism)이라는 말로 이것이 우파의 입에 재갈 물리기를 위한 정치적으로 불순한 시도이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보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본권, 자유에 대한 근본적 공격이라는 것으로 맞서면서 PC 또는 Woke-ism을 불순하고 정당치 못한 것으로 만들어 왔다.
반면 한국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극우라고 칭하고 막말이라며 정치적 공세를 좌파들이 행할 때마다 우파는 이에 굴복해서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징계하고 배척하는 패배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좌파는 이 공세에서 늘 승리하고 우파는 수비에 전전 긍긍한다. 최근 이재명 대표를 테러한 혐의자에 대해서도 친야 매체들은 그가 태극기 집회를 적극 참여한 사람이라는 것을 흘리는 데 열심이다. 탈당해서 개혁신당을 차린 이준석 대표도 중도를 장악하기 위해 태극기 집회의 과격 세력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이는 “태극기 집회”가 한국 정치에서 멀리해야 하는 단어 (Dirty Word)로 자리매김 해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좌파의 문화 공세에 굴복하는 모습은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에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막말하는 사람들은 우리 당에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 그리고 보수 당의 지도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어낸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가 모든 자유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실종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의 천박한 인식을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당 대표가 막말을 이유로 당원들의 언어를 통제할 수 있고, 그것을 빙자로 처벌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는 민주적 정당이라고 볼 수 없다.
2020년 당시의 보수당이 민주당에게 완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선거 중의 막말 논란이었다. 어이없게도 선거 운동 중이던 자신들이 공천했던 후보들을 제명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었다. 그 보수당의 막말 트라우마의 희생자가 당시 후보였던 차명진 전의원이고 관악구의 김대호 후보(사회 디자인 연구소 소장)였다. 김대호 후보의 발언은 당시 장애인을 위한 시설에 대해 반대하는 철없는 사람들에게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늙으면 장애인이 되니 장애 시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그 진실된 말, 우리 사회의 천박한 님비 현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 정직한 발언이 ‘늙은이는 장애인’라는 말로 거두절미된 채로 선거 중에 자당 후보를 제명하는 극단적 조치가 취하는 보수당의 ‘막말 공포증’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선거에는 참패를 했다.
최근에도 일부 비대위원들의 우리 과거사 또는 과거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좌익들의 인식과 다른 견해들에 대한 공세에 국힘당의 대응은 수비적이고 패배적이다.
우리 사회에 좌파와 진실에는 관심이 적은 국수주의, 종족주의 국민들이 만들어 놓은 성역들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 역사의 그 많은 질곡의 사건마다 마치 하나의 해석, 그것도 좌파적 시각이거나, 민족주의, 국수주의, 종족주의적 해석만이 진실이고 이를 벗어나면 나치를 찬양한 것과 같은 공격을 감당해야 하고, 보수 정당은 놀라서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내치고, 뒤늦은 사과로 막말 집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막말과 바른 말의 구도가 아니라, 막말 정치공세를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보수 가치에 부합하는 구도인데 이런 문화 전쟁을 치룰 가치관도 언어 선택의 능력도 보수 세력에 없는 것이 작금의 우파에게 불리한 지형을 만들어 왔다. 이는 보수의 재건을 위해 가장 몸바쳐서 투쟁한 태극기 집회의 대중과 보수 제도권의 분열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에 지배를 받는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선거에서 민주당은 계속적으로 선방을해 왔다. 그 이유 중에 하나를 미국에서 늘 정치적으로 뜨거운 낙태 이슈를 민주당이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 있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낙태가 헌법상 기본권이라는 지난 50년 동안 유지되었던 판결을 뒤집으면서 민주당 측이 이를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선거 이슈로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선방의 이유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낙태 문제를 지금까지 보수의 “Pro-Life”(생명 존중) 대 진보의 “Pro-Choice” (선택 존중)의 기존 구도 대결을 버리고 낙태의 자유를 옹호하는 민주당 측에서 새로운 구도를 들고 나온 것이 주효했다. 민주당과 낙태의 자유를 옹호하는 측은 낙태의 이슈를 “Pro-Choice”는 구호를 완전히 폐기하고 여성의 자유(Freedom 또는 Liberty) 이슈로 전환했다. 선택의 존중은 마치 여성들이 태아의 생명과 자신의 이해의 사이의 자유로운 (또는 반대 입장에서는 무책임한) 선택, 즉 생명 경시라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는 반면에 지난 반백 년간 유지된 여성의 자유가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강제와 개인의 자유의 구도가 설득력이 높고 유권자들을 투표장에 몰려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언어, 선거 구호의 위력은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 증명되어 왔다. 상속세는 어느 나라에서나 논란이다. 상속세 폐지나 인하를 주장하면 좌파에서는 부자 감세의 구도로 공격해 왔다. 이중, 삼중 과세라는 경제학적 설명은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구호였다. 하지만 보수권에서 이를 사망세 또는 사망처벌세라는 용어로 바꾸었을 때 세금의 문제점이 유권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서 보수가 이기는 이슈가 된 것이다. 부모의 사망으로 슬픈 와중에 유족에게 정부가 재산을 약탈해 간다는 주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 보수권도 정치 구도 실패로 큰 정치적 손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오세훈 시장은 좌익 쪽의 무상 급식에 해한 반대에 정치적 도박을 했다. 무책임한 복지, 무책임한 재정 운영, 보편적 복지 대 선태적 복지라는 이성적 구호로 대응했다. 하지만 반대 진영의 “애들 밥그릇 갖고 장난치냐”는 감성적 구호에 속수 무책으로 당했다. 중요한 이슈의 구도를 잘 못 설정한 결과가 한국의 정치에서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우리는 지금도 실감하고 있다.
얼마전 이 실수를 하고, 오랜 정치적 자숙 기간을 거쳐 권토중래한 오세훈 서울 시장의 강연을 통해 그의 정책들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다선 서울 시장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역경과 반추의 시간을 지낸 경험 많은 정치인으로서 서울 시정에 대한 정리된 정책 비전과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고, 이전과 달리 성숙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강연을 듣고 나는 그가 혹시 정치적 구도 설정에 다시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를 갖게 되었다. 그의 핵심 정책은 두 개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과거 시장으로 추진했던 서울을 더 아름답고 멋지게 만드는 “디자인 서울 2.0”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한다는 복지정책이다.
이를 설명하면서 그는 소위 ‘태극기 부대’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당혹스럽고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안심 소득제”를 핵심으로 하는 “약자와의 동행”의 정책은 사회적 약자들의 자존심과 인격까지 고려하는 세심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노숙자들이 무료 급식을 위해 긴 줄을 서는 일들이 없이 지정된 식당들에 가서 일반 고객처럼 밥을 먹을 수 있게 만든 점 등은 세심한 복지 개혁으로 들렸다.
하지만 “약자와의 동행”의 구호는 소위 태극기 부대의 일부에 의해, 위장 좌파라는 거친 비난을 받고 있어서 보수당의 잠룡 중의 하나로 기대를 받는 오세훈 시장은 보수 강경파와 보수 정치권의 반목과 분리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 정체성 위기를 자각한 이후에 태동한 대중적 행동 지향적 우파 정치 세력과 제도권 보수 정당 간의 갈등과 유리는 앞서 설명한 미국 또는 유럽의 보수권의 전략적 행동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보수의 분열의 책임은 분명이 양쪽 모두에게 있다. 일부 “태극기 부대”의 반지성적 행태는 보수 언론과 청년 보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거나 그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보수 여론 지형을 훼손하고, 그래서 보수 제도 정치권이 이들 가장 견고한 보수 국민들과 거리를 두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들 일부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동조하지 않은 나 자신 이들의 거친 언어 폭력 앞에 좌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의 책임과 별개로 나는 오세훈 시장이 또 정치적 언어 선택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 첫번째는 “약자와의 동행”은 그냥 전세계 좌파들의 구호이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 구호다.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자세히 듣지 않는 한 누구도 이 구호를 보수 또는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 구호로 짐작하지 않을 것이다. 좌파의 이슈는 선점하고 빼앗아 올지라도 그들의 구호와 언어까지 그대로 흉내를 낸다면 그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일 뿐이다. 일반 시민들은 전문가들처럼 자세한 설명을 듣거나 정보 탐색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이다.
또 하나는 약자들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는 세심한 복지를 한다고 자랑하면서 “사회적 약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적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함부로 쓴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빈곤하다고 사회적으로 약자일 필요는 없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서민도 인간을 계층적 관계로 칭하는 부정적 언어이다.
선진국에서 이들을 어떻게 지칭하는지 보자. 과거는 비특권층 (Under-privileged)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지금은 중산층과 그 아래 계층을 지칭할 때 근로 계층 (Working Class)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조금 궁핍하다고 약자로 칭하는 것과 달리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사용하는 이들 용어는 특정 국민을 내려다 보는 어떤 부정적 뉘앙스도 없는 언어다.
왜 보수가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이고 있는지 지금 보수 세력의 분열과 메시지 설정 능력을 돌아보아야 한다. 늘 사과나 하고 수비적인 변명으로는 국민의 열성적 지지를 기대할 수 없다.
언제까지 좌파의 언어의 전쟁의 공세에 굴복하면서,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을 경원시하고, 지지자들을 좌파를 지지할 수 없어서 보수를 울며 겨자 먹기와 같은 차악의 선택을 하는 정신적 고문을 강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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