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잊은 주술적 한국 (보수) 정치

반복되는 여당의 비대위 체제 무엇을 뜻하나?

2024.01.02 | 조회 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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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대한민국 이야기

글로벌 경제와 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합니다.

보수 정당의 위기에서의 사활을 위한 몸부림이 세간의 이목을 잡고 있다. 장재원 의원의 “희생”에 이어 예상되었던 “긁지 않은 복권”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등장이 그것이다. 대통령의 낮은 국정 지지율, 강서구 보궐선거와 부산 Expo의 처참한 실패, 김건희 여사의 어이없는 자살꼴들이 겹쳐서 위기에 휩싸인 보수 지지자들은 인요한에 이은 한동훈이라는 “메시아”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정치, 특히 보수권이 상식을 잊은 정신질환적 상태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비상한 짓이 반복되면 비상한 것이라는 것을 잊게 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비상위나 혁신위라는 우리 정당들의 위기 돌파책이 정당정치의 근본을 부정하는 셀프 쿠데타이자 대국민 기만 쇼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한동훈이라는 ‘스타’의 등장이 왜 한국 정치의 정신질환적 증상을 의미하는 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번째는 대선에서 이긴 집권 여당이 집권 1년 반 사이에 세 번째 비대위 체제를 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본질적 성찰이나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여당이 이런 지경으로 운영된 적은 없다. 그 근본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윤석열 대통령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근본 원인이라는 데 이론을 달 수 있는 사람들은 진영 정치에 매몰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많지 않을 것이다.

인요한 위원장이든 한동훈 위원장이든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국힘당이 국민에게 외면당하는 것에 대한 심층의 진단이 이루어진 적도 없다. 원인이 대통령이라서 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당이 이재명이라는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당이 모두 민주주의의 원칙 아래서 운영되지 못하고 당권을 갖는 권력자의 사당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근본적 문제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정당은 정치인들에게는 권력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국민에게는 그것이 민의를 반영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훌륭한 정치적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집권 2개월부터 실패한 정권 말기의 지지율과 유사한 윤석열 정부의 낮은 지지율의 근본 원인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당 정치와 대통령의 실패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나 외면 상태에서 어떤 쇼를 하든 임시적인 국민들에 대한 눈속임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정치인들 특히 여권은 혁신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그러면서 인용되는 성공 사례가 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다. 신경영은 선언이 아니다. 기업의 경영자 치고 기업의 혁신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공한 혁신은 드물다. 삼성의 신경영은 싸구려 휴대폰을 불사르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신경영이 성공적 혁신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는 저임금과 정책 자금에 기대어 싸구려 제품을 양산하던 기업이 첨단 기술력으로 무장되고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명품 제품을 만들고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 혁신이다. 즉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업의 본질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 또는 정치의 혁신도 정치권이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해결하려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거시적으로 사회의 흐름을 읽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밝은 눈과 용기를 갖는 정치 지도자들을 발굴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정당은 이것을 하는 조직이다. 본질적 혁신을 외면하는 국민의 눈길을 진영 정치의 쇼로 가리려는 것이 내가 비상한 조직을 반복하는 정당들의 행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한동훈의 등장에 내포된 한국 정치의 비상식적인 비정상적인 병적 현상들을 살펴보자.

우선 혁신위와 언론과 여론들은 줄기차게 ‘윤핵관’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이러한 압력에 굴해서 총선 불출마를 발표한 장재원 의원도 자신의 “희생”을 강조했다. 자신의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희생양이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인간의 죄의 사함을 빌기 위해 죄 없는 양을 죽여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 속죄의 희생양은 죄를 지은 자나 그런 죄를 행하게 만드는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기 보다는 죄 없는 동물로 신의 노여움을 달래 보려는 주술적 세계관의 행위이다.

한국 정치에서 권력의 근처에 있는 다선 의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심리도 이런 주술적 모습에서 한치의 벗어남도 없다. 국민들로부터 정권과 정당이 외면 받게 된 구조와 원인의 책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군중의 노여움을 희생양을 만들어 달래 보려는 것이다. 과학이 없던 시절의 무력한 조상들의 기우제와 다를 바 없는 이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인 것이다.

문명화된 민주주의 국가라면 책임과 희생은 구분해야 하고 강요된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책임을 희생으로 각색하는 정치인이나, 묻지마 희생을 요구하는 홍위병식의 여론 몰이도 민주주의의 상궤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윤핵관 의원의 불출마나 당대표의 사임이 당원과 유권자의 뜻과는 무관한 권력자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것 또한 정당이 국민과 유리된 그 구조가 그대로 작동한 것이다. 즉 혁신의 대상이어야 할 그 구조가 희생양을 만들며 혁신의 표적에서 숨어버린 꼴이다.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인물 갈이를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수십 년째 경험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의원의 물갈이가 심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렇게 진입한 초선 의원들이 정당 정치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었는가? 정반대로 공천권에 노예가 된 그들은 권력자에게 줄을 서고 아부하는데 앞장선 부역자들이다. 국힘당의 윤 대통령의 사당화의 홍위병들이고 민주당의 개딸들의 앞잡이들이 초선의원들이었다. 이준석 전대표를 몰아내고, 대통령의 뜻을 살펴 나경원 전 원내대표를 극언으로 비난하고 주저앉게 만든 홍위병들이 그들이었다.

우리는 왜 과거와는 달리 우리 정당에서 젊은 정풍운동을 주도하고 시대를 이끌겠다는 새로운 정치인들이 소멸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의 정당들을 지역 패권을 가진 유력 정치인들의 가신 정치 간의 경쟁 구조하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즉 정당이 복수의 지도자들의 경쟁구조 하에서 움직였다. 따라서 3김으로 표현되었던 지도자들의 보호 속에 신진 정치인들이 당권과 무관하게 발언하고 행동할 공간이 존재했고, 3김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 확대를 위해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정치 신인을 발굴하고 키워야 하는 경쟁을 했었다. 하지만 이 구조가 해체된 지금 두 거대 양당은 공천권을 갖는 당의 권력자에 의해 철저하게 사당화 하는 독점 구조로 변모했다. 과점의 정당이 권력 독점의 정당들로 퇴화한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새로운 신인들은 그 자질과 의지와 상관없이 공천권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가 상존하는 한 어떤 개혁의 시도도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는 속임수일 수밖에 없고 당권을 쥐는 사람이 바뀌면 그에 줄을 서는 레밍들의 모습이 반복된다.

한동훈 위원장을 이준석 전대표는 “긁지 않는 복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복권을 긁는 심정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인생에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노력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횡재를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우재를 지내고 희생양을 올리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면 메시아를 갈망한다. 인요한 위원장이 등장했을 때 환호했던 보수권의 기대나, 한동훈 위원장에 대한 높은 기대를 거는 심리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 여당은 국정의 상당부분의 책임지는 조직이고 세력이다. 국민의 삶이 이들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이 여당의 지도자 그것도 비상 대권을 갖는 당권이 아무런 경쟁이나 검증 과정이 없이 소수의 결정에 의해 주워진다는 점이다. 바로 복권을 긁는 무책임하고 운명론적인 과정에 의해 선정된다. 우리가 선거라는 검증과 경쟁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반기는 심리의 저변에는 정치 혐오라는 국민 정서가 존재한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정치권 밖의 누구라도 정치인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치야 말로 경험의 직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 한국의 주요 의사결정이 정치적 행정적 경험을 하지 못한 권력을 쥐고 나서야 실습을 시작한 대통령과 초선 의원들이 하고 있고 그것이 불안한 정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가 상당 수의 국회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당 대표를 당원도 아닌 사람을 당에 가입과 함께 검증과 경쟁없이 지명으로 선택하는 나라가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비정상의 정당 정치를 수십 년째 반복하면서 이것이 상식과 원칙을 벗어난 것이라는 인식마저 없다.

절망에서 찾는 정치적 메시아는 자주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나찌가 그렇게 등장했다. 무능한 정치인이 권력을 잡고 나라를 망치는 빠른 길이 바로 국민들의 성급한 바람에 의한 선택이다. 포퓰리즘이란 것은 바로 국민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권을 긁어서 아주 낮은 확률로 횡재를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꽝이다. 우리는 요행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위험을 최소화하려고 선거라는 경쟁을 거치는 것이다. 그것을 생략한 이 무모한 당권 이양의 봉건적 관습이 정치 불신과 선거에서 어떻게 든 이겨야 한다는 진영 논리의 초조감에서 아직도 비정상이고 비상식적인 관행이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묻지 않는 한동훈의 등장의 세번째 문제는 법치의 훼손이다. 법무부와 검찰은 행정부에 속하지만 사법의 중요한 주체다. 기소 독점권을 갖고 수사권까지 갖는 우리 검찰은 다른 나라와 달리 사전 구속을 남발하는 비대한 권력을 갖고 있다.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아직도 일반인에게는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가의 서비스로 남아 있다. 우리는 검찰총장에 바로 대통령이 되고, 법무부 장관이 바로 대권 후보 반열에 오르고 여당의 당대표로 비상 대권을 갖는 이 현상이 법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지 않고 있다.

법무부나 검찰, 경찰과 같은 법치의 제도적 장치가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남용될 가능성 때문에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은 행정 권력에서 비교적 중립적이고 권한을 독립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선진국의 모습이다. 그런데 문정권의 추미애, 조국 등이 당파적 법무장관이 되어 사법을 정치화하는 일탈을 선도하더니 이제 여당의 법무장관이 그 직위를 활용해서 대권 후보가 되는 노력이 성공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사법의 수단들이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있다는 비판과 일반 국민에게도 사법의 독립성과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보수의 가치 중에 법치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 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 정치권력의 수단화가 지난 정권에 이어 이번 정권에서도 노골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런 점에서 한동훈의 신데릴라적 현상은 법치가 근간이 되는 헌정 질서의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불행한 현상이다.

여권 지지자들의 초조함을 몰라서 하는 비판이 아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진영을 떠나서 선진화되고 문명화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정당 정치가 일탈에 일탈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으면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어느 정당이든 비대위 체제는 성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서 당원이 주인이 되어 당을 바꿀 수 있어야 근대 국가이지 한 명의 스타가 나타나서 세상을 청소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메시아를 갈구하는 절망의 심리의 표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의 국정이 한 개인의 능력이나 개인기로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우제를 지내고,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복권을 긁어 1등 당첨이 되기를 기대하는 주술적이고 요행을 기대하는 비과학적이고 비제도적인 짓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복권 당첨은 꿈꾸기에만 달콤한 환상이다. 검증과 경쟁없이 등장하는 정치 신인의 묻지마 비대위원장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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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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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

    0
    9 months 전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5/article_no/3127 정당을 기업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비슷한 관점으로도 볼수 있을 것 같아 공유해봅니다. 국힘당은 지금 4단계 구원을 찾아 해매는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ㄴ 답글
  • 김치보이

    0
    9 months 전

    좋은 글 정말로 감사합니다.

    ㄴ 답글
  • 아르거스

    0
    9 months 전

    국민들 대부분이 정한수에 평안을 기원하고 인형저주술을 믿는 후조선시대를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국민 수준에 어울리는 정치입니다. 개혁적인 지도자(예:윤희숙 의원)를 중용되지 못해 너무 화가나고, 얼굴마담이나 똘마니 지도부 선출을 보니 여야 모두 희망이. 없네요. 세금 내기 싫어집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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