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 우리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행사 때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안보가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경고를 반복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수 지식인 이문열 작가는 “反국가세력 겨냥한 尹 대통령의 이념전쟁, 용기있고 위로된다”며 일부 보수권의 정서를 전하면 지지하고 나섰다. 그간 대북 온건 정책 일변도의 자세를 취하며 자유 민주주의의 우리 국가의 가치보다 민족을 앞세우고 그것도 보편적 인류의 가치는 외면하고 국수주의, 종족주의의 천박함을 정치에 악용해온 좌파 (소위 자칭 진보,민주) 정권들의 역사 전쟁을 생각하면 이러한 보수권의 윤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일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뚜렷한 자유주의적 보수의 이념 지향이 없이 저들의 정치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무능을 안타까워했던 보수권에게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 공세는 '사이다'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통쾌한 복수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 과연 "공산전체주의와 그 추종세력"에 의한 국가 전복의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인지와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 공세'가 정치적으로 현명한 것인지는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동서 냉전체제의 종말을 상징했더는 베를린 장벽이 넘어지고 전세계에서 공산주의을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극소수이다. 베를린 장벽의 와해와 구 소비에트 체제의 몰락 직후인 1992년 프란시스 후쿠야먀는 "역사의 종언"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을 통해 2차 대전 이후의 비극을 초래했던 체제 경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자유시장경제와 공산주의의 경쟁,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정치제제의 경쟁은 자유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로 역사적 심판이 분명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언했다.
지금 세계가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우려하고 있지만 적어도 후쿠야마의 주장 중에 공산중의에 대한 역사적 몰락에 대한 주장에 의심을 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직도 공산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들은 극소수이다. 중국, 쿠바, 라오스, 북한, 베트남이 공산 일당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로 UN에 의해 국가로 인정되는 195개국 중에 단 5개국에 불과하다. 네팔, 가이아나, 몰도바 등은 다당제 하에서 선거에 의해 잠시 공산당의 지배가 행해진 경우가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 프로레타리아 독재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믿고 전세계를 공산화하겠다는 망상을 갖고 있는 나라라기 보다는 독재 권력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판단이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이들 5개국 중에 경제력을 갖고 있는 중국과 베트남이 경제적으로는 이미 공산주의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다는 데 있다. 나머지 쿠바, 라오스, 북한은 경제력으로는 의미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의 군사적 협력체제이다.
이들 중에 러시아는 푸틴의 피터 대제의 대러시아 영화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종신 독재의 전체주의가 결합된 형태이지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다.
중국 또한 세계를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이 포기한 공산주의나 자신들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Soci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를 강제력으로 전파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그들이 이미 공산주의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다른 나라에 전파 또는 강요할 목적이 있다면 "중국 특색"을 들고 나왔 리 없다. 중국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환경, 즉 새로운 패권국가이다.
중,러의 미국 및 서방에 대항하는 패권경쟁의 필요성에 의해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고 봐야 하고, 북한은 공산주의 우수성보다는 김일성주의, 즉 봉건 왕조의 영속을 추구하기 위한 김씨 일가의 권력독점에 일당독재 체제를 정당화하는 공산주의를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안보 위협은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에 의한 위협이라기 보다 전체주의와 일부 강대국의 패권경쟁으로부터의 위협으로 보는 것이 맞다.
공산주의가 우리의 자유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주장은 이런 점에서 역사의 흘러간 물을 되돌리려는 것처럼 실존하기 보다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는 것과 같다.
안철수 의원은 본인은 그런 발언을 한적이 없다고 억울해하며 항변하지만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져서 보수권의 거센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정전 상태에서 군사적으로 대결이 지속되고 있는 남북한에서 간첩이 없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간첩은 상대 국가의 정보 수집이라는 소극적 행위부터 사회 교란이나 테러와 같은 군사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적극적 행동을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적극적 행동의 간첩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위해 정보원 내지는 사상적 동조자를 포섭하는 간첩들은 상존하고 있고, 우리도 그런 스파이를 유지하고 있어야 정상 국가이다. 그것은 반드시 적대적 국가들만의 일이 아니다. 많은 나라들은 능력이 되면 이러한 첩보 활동을 하고 있고 우리나라에 미국의 첩보원 (간첩)도 존재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안 철수 의원이 했다고 한 발언 (본인은 와전되었다고 주장하는)의 의미를 덜 부정적으로 해석해본다면 간첩이 우리 사회에 주는 위협은 크게 감소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체제 경쟁에서 분명한 승리를 우리가 거두었기 때문이다. 탈북민들이 몰려들고, 북한의 '고난의 행군'의 굶주림과, 김일성 일가에 의한 인권의 사막 국가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첩의 선동에 대해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는 과거 북한이 보내는 삐라가 국민을 현혹할까 전전긍긍했고, 북한의 모든 선전매체의 접근을 금지하고 처벌했던 과거가 있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신이 없었고, 교육수준이 낮은 국민들을 못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많다고 해서 이들이 공산주의, 그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낮은 봉건주의적 전체주의, 그리고 왕조처럼 세습되는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국민들이 많이 있고 이들이 체제 전복 즉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북한의 조력을 받아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은 국민들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고령세대들이 청년세대들은 아무런 판단 능력이 결핍된 철부지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세대 인식차이의 근본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신패권경쟁과 북한 독체제제의 서로의 필요에 의한 러중, 북한의 안보위협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역사적 종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념 공세', '신 메카시 선동'으로 간주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강조되는 이념 공세는 이문열 작가의 지지와는 달리 고령층이나 극보수층을 넘어 공감을 받기 어렵다.
자유(Liberty)의 역사는 권력(정부)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보호를 받기 위한 투쟁의 결과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개인의창의성을 발휘하려면 개인의 권력과 사회의 집단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는 것은 루쏘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과 시민들의 피흘린 항거의 결과다.
자유(Liberty)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억압적인 권위가 개인의 삶의 방식, 행동 또은 정치적 견해에 가해지는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다" (Liberty is the state of being free within society from oppressive restrictions imposed by authority on one’s way of life, behavior, or political views. (New Oxford American Dictionary).
여기서 말하는 억압적인 권위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권력(정부)다. 물론 도그마에 빠지고 세속권력과 결탁한 종교, 전통적이고 획일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문화, 경제적 권력 등 수많은 권위들이 개인의 자유와 충돌한다.
21세기의 자유는 온갖 이념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건강한 환경을 갈구하지만 극단적 환경주의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선택을 죄악시하는 경향과 규제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성차별을 반대하지만 성간 대결과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판단을 특정 틀에 강요하는 극단적 페미니즘 또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기여를 믿고 발전시키고자 하지만 과학주의, 과학권위주의는 자유에 대한 위협임을 지난 판데믹 과정을 통해 절실하게 경험했다. 실증적 이론적 근거도 희박한 마스크 강요에서부터 우리의 이동과 행동, 경제적 자유를 마구 제한했던 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해집단의 압력과 복지 포퓰리즘이 경제적 자유를 얼마나 제약하고 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사농공상의 봉건적 가치관에 따른 큰 정부주의, 관료주의는 관치경제로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적 자유가 크게 떨어진다. 검찰의 권력은 인권보다 더 중요시되고 행사되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 추구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복을 잡고 있는 가장 큰 제약 요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주의적 취임사에 열광했었다. 그가 소중하게 읽은 책이 프리드만 부부의 "Free to Choose" (선택할 자유)"라는 말에 자유주의자들은 열광했고, 대표적인 자유주의 학자 중 한 분은 이승만 대통령 이후 개인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권의 핵심 가치관으로 내세운 유일한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칭찬과 기대를 표한 적이 있다. 나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개인들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 치적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아직은 내세울 것이 없다. 북한의 안보 위협에 대비해서 외교적으로 한미일 협력 체계를 강화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이 울타리를 견고하게 한 것 이 외에 이 울타리 내부의 자유를 크게 늘린 획기적인 정책이나 행보를 보인 적이 없다.
경제적 자유도가 늘어난 바도 없고, 관료 우위의 관치경제가 사라질 조짐도 없다. 학부모나 학생이 교육의 대안 중에서 선택권이 늘어난 바도 없다. 의료 소비자들에게 의료의 선택을 확대한 바도 없다. 국가가 통제하고 획일화된 연금 개혁도 이루어진 바가 없고, 중앙 권력을 지방에 이양하거나 축소한 것도, 검찰이나 규제기관이 권한이 축소되거나 개혁된 바도 없다. 검찰과 규제 권력의 행사가 이전 정부들에 비해 크게 개선된 것도 없다.
반면에 대통령의 여당 장악은 권위정부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정치적 반대자 또는 충성 맹세를 하지 않는 자들의 숙청에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지속되어 왔다.
그의 취임사의 정부보다는 민간 중심의 경제를 운영하겠다는 본질적인 자유주의 선언은 이제 이념 대결과 실존하지 않는 역사의 종언과 더불어 잔해만 남은 공산주의 위협을 연일 강조하는 수구적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안보의 위협에 대한 경고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의 자유의 위협과 제약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그가 심취했다는 국민의 "선택의 자유 (free to choose)"의 확대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억압적 권위 그것을 해체하고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개혁이 윤석열 취임사가 시사했던 자유다. 그 자유는 이제 잊었는가?
촘스키는 1998년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만들고 굴종적으로 만드는 가장 교묘한 방법은 수용할 수 있는 의견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 의견의 범위를 제한하고 논쟁하면 사람들은 자유로운 생각들이 진행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미 제한된 가정에 의해 논쟁의 범위는 제약되고 그 제약 내에서 강화된다."
자유의 논쟁은 이미 공산주위와 추종세력의 위협과 안보가 아니라 (그건 정부가 알아서 하면된다), 개인의 자유, 정부와 시민, 정부와 시장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게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가 약속했던 논쟁이다.
어느 사회나 이단적이고 극단적인 소수가 있다. 그 소수가 언제나 다수를 다 현혹하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은 음모론이거나 국민에 대한 신뢰가 낮은 권력자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수구적이라는 심판을 피하려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취임사에서 행했던 연설문과 미 의회에 했던 연설문을 스스로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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