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햇볕은 확실히 가을답게 여름의 것과는 별개로 따갑고 강렬하다. 다만, 습기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아 아직 한창 여름처럼 며칠 내내 땀을 흘리고 다니는 중이다. 월급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센다면 한달 한달 넘어가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 8월과 9월 초는 순식간에 지나 다다음주면 벌써 월급날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이번 더위와 동반한 나의 생업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 지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다음주도 일에 쫓기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갈 것이므로 그렇게 9월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러나 아직 겨울은 멀리 있다.
H와 스타벅스에서 새로나온 마롱케이크를 먹다가 작년에 E에게 받았던 밤조림이 생각났다. 한달을 꼬박 숙성시켜서 먹었던 그 보늬밤 한 알 한 알은 내가 먹어 본 밤중에 가장 맛있었다. 밤조림은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리틀 포레스트>에서 수없이 봤기에 알고있었지만 직접 만들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작년부터 한국에 들이닥친 보늬밤 만들기 유행에 혜택을 입어 나도 수제 밤조림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이 마롱케이크 비싸던데 되게 조그맣네, 얄밉게. 라고 H는 말했다. 마롱케이크는 사실 그 안에 든 밤조림 값이지. 정확히는 밤조림을 만드는 정성값이다. 밤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려고 포크로 쪼개다가 부드러운 케잌 시트가 자꾸 짓이겨지길래 그냥 내가 조금 베어먹고 나머지는 H입에 넣어줬더니 행복해한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밤조림을 만들어볼까,했다. 아마 주말 하루는 다 보내야 할것이다. 병조림 사기, 밤도 맛있는 밤(공주밤을 사야 할 것이다.)을 사야지, 병 소독해야지, 밤을 까야지, 몇번이고 졸이고 씻고 졸이고 씻어야지, 또 포장까지. 그래도 그런 행위를 하면서 가을이 오는 것을 느끼고 밤조림을 핑계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맛있게 익을 밤조림을 기대하며 한달을 버티고, 초겨울이 오기 직전 밤조림을 먹으며 가을이 가는 것을 아쉬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요새 집에서 어떤 간단한 요리도 해먹지 못하는 비애의 직장인1일 뿐이다. 출퇴근 도합 4시간 육박, 내 능력 밖으로 주어지는 업무, 소홀할 수 없는 사랑, 얼굴을 비춰야 하는 가족 등을 차례로 챙기다보면 내가 사는 집 바닥을 쓸 여유조차 사라진다. 한탄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집에서 편도 2시간 거리에 직장을 잡은 것도 나, 주어지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하는 것도 나, 사랑을 하는 것도 나, 가족과 강아지 얼굴을 보고싶은 것도 나니까. 청소는 늘 뒷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가장 주변을 정돈하지 못하는 나는 지나가는 시간도, 계절도 마음껏 느끼지 못하고 그저 바쁘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정쩡한 30대가 되어있다. 옷가지나 물건들이 이리저리 놓인 집에서 급하다고 대충 주워입고 다니는 내가 좋을리가 없다. 그래서 땀을 잔뜩 흘리며(하도 끓이니까 밤조림 만들면 땀이 난다고 E가 그랬던 것 같다.) 밤조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나는 요리하고 집을 쓸고 닦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을 적당히 하는 나였다. 그 모습들은 모두 나를 위한 모습이었다. 나를 위한 한끼나 음식을 만드는 행위, 내 주변을 정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모습을 통해 지금의 비정상적인 나의 생활패턴의 균형을 맞추고싶다. 그러려면 추진해야할 계획들이 많다. 매일 직장에서 쓰는 계획안만 고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도 추진계획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번 가을은 집중해서 즐길 것들을 준비한 다음 정서적으로 풍족하게 보내고, 따뜻한 겨울을 위해 적당한 땔깜을 준비하는 시기로 만들어야 한다.
케이크를 싹싹 긁어먹고도 한참 수다를 떨고 나와 잠깐 들린 다이소에서 밤조림용 병들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H에게 밤조림 만드는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그 이후에도 숙성이 한달정도 필요하다고 했더니 이내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물론 고생스러울까봐 반사적으로 나온 거절이겠지만 나는 사실 H와 같이 만들 계획이었어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생각했다. 그저 강렬한 태양빛에 충실히 익어가는 내 팔처럼 곡식도 충실히 익어가고 있을테니, 조금더 잠을 일찍 자고, 일은 적당히 하면서 집에 누워 손가락을 튕겨가며 맛있는 가을 밤을 찾아보기만 하면 된다고 마음 편하게 여기고 있다.
전쟁같은 한주를 앞두고 얄밉도록 작은 케이크를 먹은 일을 생각하며 긴장을 풀어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나눠먹은 H가 있는 곳을 생각하고 그 힘든 밤조림을 만들어준 E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완화되는 것을 느낀다. 오늘 밤도 일찍 자긴 글렀지만 아늑하게는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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