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셋째 주경 디자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2022년 초 직장을 잘 못 만나 심한 몸 고생 맘고생을 하고서 이를 갈며 직업을 바꿔보겠다고 고민한 결과였다. 유명한 학원이었고 주변의 디자이너로 새로운 경력을 쌓는 지인들이 추천해 줬기에 한 달 가량 기다렸다가 다닌 참이었다. 물론 이 한 달의 기다림조차도 매우 빠른 축에 속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누군가와 우연히 대화했을 때 그는 4개월을 기다렸다고 하는 걸 보니.
그렇게 현재 2023년 9월 마지막 주가 되었으니 1년이 훨씬 넘었지만 사실 중간에 몸이 너무 힘들어 2개월을 쉬었으니 12개월을 채웠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쳐도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처음엔 6개월, 그다음엔 8개월 정도를 최대로 다니고, 취업하는 게 목표였지만 지금은 2년을 다녀도 내가 원하는 지점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1년 즈음 되는 오늘 학원을 다시 멈춰가기로 했다.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고민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늘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보였고 남 탓할 여지도 없었다. 내가 선택하면 선택한 길을 걸어 감당해 내면 됐다. 그때의 어느 시점과는 정반대로 지금은 '잘'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선택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고 믿고 싶지 않고 혹여 잘못 선택한 것처럼 상황이 흘러갈지라도 내 선택에 책임을 지고 즐기면서 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제 무엇도 없는 고난은 조금 지치기 때문에 고뇌를 거듭해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걸 바로 뒤늦게 겪는다고 하나.. 나는 나보다 10살 가량 어린 동료들과도 일하고 있는데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 동료들이 본인의 값진 생각의 결과물과 응원을 내게 준다. 나만 현명하면 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오랫동안 나를 참아준 인내심이 정말 대단한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왜 멈추고 싶은지 변명의 어조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지난 석 달간은 바쁘다는 핑계도, 회피도 없이 그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학원을 다녔으니까. 큰일 났다는 기색도 없이 학원에 와서 탱자탱자 도형이 무질서하게 떠 있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으니까 예상 못 했을 리 없다. 그는 기다려 주듯이 알겠다고 했다. 지난번엔 학원을 멈추고 이제 좀 쉴 수 있겠다, 는 생각에 마음이 후련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그러나 고심해서 한 선택이다.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었고 흔들림을 무시한 채로 일상을 지내고 싶지 않았다. 이 업계 현업을 겪고 있는 선배들을 차례로 만나서 차가운 조언도 듣고 여러 정보도 들어야 한다. 오히려 바쁠 것이다.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명쾌해졌다.
집에 와서 개운하게 샤워할까, 했는데 몸이 무거워서 침향을 피워놓고 맥주 먼저 들었다. 공간이 생긴 기분이다. 내가 도망갈 공간이자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시공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이런 거였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도 지금껏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던 사회의 어두운 면, 분노할 만한 일들을 보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맥주를 마시며 이런 글을 써 내려가고, 지키지 못할 계획들이어도 적는 동안은 행복하고 마음이 여유로워 담배도 태우기도 이런저런 행위를 하고 싶었다. 하나라도 빠지니 조금 숨통이 트임과 동시에 이 정도로 짓눌려 있을 필요가 있었나, 무안하기도 하다.
이제 뭘 해야 하지-어떤 걸? 이 아니라 어떤 순서로? 어떤 걸 가장 원하지? 의-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쓰는 것이었다. 간단한 화면을 배치하고 만드는 건 3개월간 하루 2시간 반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절대로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내 작은 서재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다리가 붓더라도 고단하지 않으며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숨이 나오는 건 정작 나의 견디는 힘은 이렇게도 약한가 싶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을 즐길 수 있으며 다가오는 고마운 휴일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대문을 열고 맥주를 따르기 전까지 늘어놓고 싶은 생각들은 많았는데 휘발되어 버렸다. 요즘 한계가 명확한 머리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맛있는거나 먹으면서 팬티만 입고 강아지랑 누워있는 수밖에 없겠다. 맞다.. 햇밤도 주문 해야한다. 아무래도 이런 기억이 벌써 돌아오는 걸 보니 오늘의 과정이 효과는 있나보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