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청부업자 K_Ep01

안녕, 내 이름은 K

2022.09.23 | 조회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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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자의 낭만주의

은말하고 야릇한 망상. 고수위 고품격 19禁 소설.

안녕. 내 이름은 K. 본명은 비밀이야. 뭐, 그냥 이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면 되겠지? 30대의 매력적인 여성이며, 터프하고 지적이고 괴짜라는 것 정도는 말해줄까. 자가 판단은 아니니 아마도 신빙성은 꽤 높을 걸. 

하나만 덧붙이자면, 사람들 말을 종합해보면 나는 나이나 환경을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를 지녔다(고들 한다). 굉장히 입체적인 아우라를 자아낸다고 할 수도 있겠고. 나는 허영심 있고 머리 나쁜 여자 흉내도 잘 내고, 지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전문직, 빨간 페라리를 타는 귀부인 캐릭터도 곧잘 만들어내곤 하니까. 게다가 이래봬도 상류층 취향에 해박한 인텔리거든. 바흐의 칸타타부터 현대 철학까지 모르는 게 없지. 

뭐, 처음부터 내 자랑이나 하려고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건 아니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배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는 부연설명이지. 실제로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유리한, 중요한 재능이거든. 스파이 산업이 버블처럼 융성했던 냉전시대의 동유럽쯤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그쪽에 발을 들여서 이름을 날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에서는 내가 꽤 유용했을 테니까. 

“선배, 왔습니다!” 

리시버에 대고 고함을 치는 이 녀석은 태수다. 우리 직원이다. 목표물이 시야에 들어왔고, 곧 스팟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12분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걷는 속도로 봐서 한 7, 8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요! 준비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이쪽에서도 잘 보이니 호들갑 안 떨어도 돼.”

김태수는 우리 팀에서 하이테크를 담당하고 있다. 대학 때 교내 해킹 동아리의 에이스였는데(어이없게도 체대생이었다), 사이비 종교단체만큼이나 음험한 국내 최대 기업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불장난을 거하게 하다가 일이 꼬였고, 25년 전통의 동아리는 풍비박산이 났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전설이 되었다. 그 결과 양지로는 다시 나갈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린 걸 내가 데려왔다.

‘내가 FBI 자료도 이틀이면 다 털어낸다.’ 태수의 입버릇이다. 무슨 영화에서 나온 대사 같기도 하고. 평소에 건방지거나 뻣뻣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녀석 답지 않은 말이다. 그런 소릴 할 만큼 실력 하나는 자신이 있다는 거지. 바보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아니 사실 없으면 안 되는 녀석이다. 해킹, 신분 위조, 감청, 추적, 데이터 탈취, 자금 세탁 등 태수의 손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우리 일이 정상적인 사업은 아니니까 말이지. 물밑 장사라구.

아, 우리가 하는 일은, 음, 설명이 좀 필요하다. 흔히 쓰이는 용어로 말하자면 청부업자라고 할까. 이렇게 말하면 꼭 무슨 살인청부업이나 뒷골목 흥신소 따위를 떠올리지. 그거 아주 곤란하다. 물론 물리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 바닥에서 일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별별 일을 다 마주치게 되거든. 말했듯이 상식적인 사업은 아니니까. 그래도 폭력은 우리의 전문 영역이 아니다. 

하긴 뭐, 엄밀히 말하자면 누굴 괴롭히는 일이 맞긴 하다. 일종의 복수 대행업, 원한 해결 사무소라고 할까? 다만 우리는 원한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성적 수치심을 이용한다. 사연 있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그 사람이 원망하고 증오하는 이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수치스러운 경험을 안겨주는 거지.

알몸 사진이나 섹스 몰카로 협박하냐고? 그런 천박한 소행이나 할 거면 나 같아도 3류 양아치 조직 찾고 말겠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훨씬 세심하고 예술적인 방식이다. 수치플을 아트의 경지로 승화시킨다고 할까. 나처럼 각종 BDSM 플레이 테크닉과 심리, 인간의 성적 쾌락에 두루 능통한 베테랑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게다가 대외적인 간판용이긴 해도 우리는 엄연히 사업자 등록도 되어 있고 직원들 4대 보험도 적용되는 사업체야. 평가절하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우리를 찾아오는 고객은 다양하다. 의뢰 절차는 비밀스럽고 보안도 이중삼중으로 까다롭다. 무슨 인터넷 쇼핑몰에서 신발 사는 것도 아니니 당연하잖아. 그런데도 어떻게들 알음알음 꾸준히 찾아온다. 세상에 누구한테 원한 산 사람이 많기도 하다 싶어 좀 놀라기도 했지.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는 창업한지 일 년도 안 되어 빠르게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과욕을 부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도, 지금은 어엿한 중소기업 수준은 된다.

다만 우리는 일을 맡을 때 보수의 액수에 그다지 연연하지는 않는다. 의뢰자의 사연, 그리고 복수를 당할 대상이 얼마나 흥미를 끄느냐를 더 중요한 기준이지. 그러다보니 거의 무료봉사를 하는 경우도 은근히 있다. 반대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는 잔뜩 뜯어내니까 수지타산은 충분히 맞는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본격적인 수입원은 따로 있기도 하고.

“레베카, 거기는?”

“언니, 이쪽도 끝났어요.”

레베카는, 태수와 마찬가지로 우리 팀원이다. 스물여섯 살로 태수와 동갑이고, 이름은 이미나인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레베카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굳어졌다. 160cm가 안 되는 작은 체구에 중국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아이다. 가끔 태수의 위압적인 거구 옆에 서면 진짜 신기한 그림이 나온다. 서로를 <진격의 거인>의 초대형 거인과 인간 꼴로 만들거든.

레베카는 우리 팀의 콘텐츠 제작 담당이다. 가끔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애니메이션 번역체 말투가 맥 빠지게 해서 그렇지, 태수만큼이나 능력자다. 사진과 영상, 그래픽 디자인과 웹디자인, 작문, 패션 관련 등등 거의 전방위적인 분야에 걸쳐 탁월하다. 가끔 이 아이가 일하는 걸 보면 눈이 네 개, 손이 여덟 개쯤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어. 충만한 덕력이라는 게 수수하면서도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증거 치고도 꽤 믿을 만한 증거라고 할까.

레베카는 진성 백합 오타쿠다. 그녀는 십대 중반부터 현생은 꿈이요, 덕의 세계야말로 진실이라는 기치 아래 본격적으로 자기 적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쪽 세계에서는 동인지 내고 팬 미팅까지 할 정도의 레전드였는데, 어느 날 태수처럼 심각한 사고를 치고 매장 당했다. 여자 아이돌로 팬 창작물을 만들다가 수위가 선을 넘는 바람에 언론 보도까지 되고, 팬덤에게 찍혔다던가. 나는 그 분야는 전혀 문외한인데 듣자하니 불문율 같은 게 있나 보더라고. 음지의 문화는 음지에 있어야지 섣불리 해가 드는 곳에 드러내는 건 금기라고들 하나봐.

“완벽해요. 안에 아무도 없어요.”

“좋아. 곧 그리로 갈 거야.”

나는 고성능 스코프와 아이패드, 카메라 등 섬세한 장비들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오늘의 시놉시스는 비교적 심플하다 시뮬레이션도 다 끝냈고. 공공장소에서 하는 거라 예상 밖의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생기더라도 플랜 B로 넘어가면 된다.

나는 스코프에 눈을 대고 큰 길 건너 맞은편의 카페를 보았다. 건물 앞에서 레베카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 뒤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나타났다. 검은 플리츠 미니 원피스와 챙 넓은 모자 차림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그녀는 카페 문 앞에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목표물이다.

정해진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어서, 나는 그동안 그녀를 천천히 감상했다. 흔히 말하는 강아지상의 귀여운 얼굴에 불안감이 역력하게 어려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한껏 예쁘게 꾸미고 왔다. 무슨 봄철 피크닉 나온 여대생으로 보인다. 마음에 들어. 이런 아이일수록 돋우고 망가뜨리는 맛이 있지.

태수는 늘 아쉬워하는 부분인데, 우리의 작업 타깃은 8할이 여자다. 내 취향 때문이지. 원래 오너의 성향에 따라 회사의 성향이 결정되는 거잖아. 이 점은 애플이나 넷플릭스도 마찬가지일 걸. 난 뭐 딱히 남자를 혐오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바이섹슈얼이지만 8:2 정도로 취향이 여자 쪽에 쏠려 있을 뿐이지.

남자 따위는 아름답지도 않고, 뻣뻣하고 푸석푸석한 데다 결정적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입체적이면서 깊고 오묘한 여자의 몸과 달리, 남자는 미학이라는 게 없잖아. 도대체가 창조적인 행위를 할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미술가들이 그 유구한 세월 동안 주구장창 여자만 홀딱 벗겨서 그리고 깎아댄 이유가 뭐겠어.

아, 태수는 게이다. 그것도 섹스에 환장한 발정 난 게이. 컴퓨터와 남자 엉덩이 말고는 딱히 흥미도 취미도 모르는 녀석이지. 그리고 녀석의 남자 취향을 식성에 비유하자면, 세상에 맛이 없는 음식이 없는 타입이다. 사람이 못 먹는 무슨 플라스틱 같은 거 빼고는 다 먹는, 가끔 유통기한 지난 우유도 멀쩡하게 삼키는 사람 있잖아.

그래서 간혹 남자가 타깃인데 정 거절하기 뭐한 의뢰가 오면, 그냥 태수한테 알아서 하라고 맡겨버린다. 그리고 태수는 일을 마친 다음날이면 포만감으로 안면에 광채가 만연해서 나타나곤 했다. 의뢰를 받으면 상대에게 동정의 여지를 두지 않는 게 우리 룰이라지만, 녀석이 휘두르는 마늘 찧는 방망이 같은 걸 밤새 받아들였을 희생양을 떠올리면, 나도 연민이라는 게 생길 지경이야.

9시 30분이 됐다. 생각은 이쯤 하고 이제 일을 해야지. 카페 앞의 여자가 휴대폰을 들어 뭔가를 입력하는 게 보였고, 곧바로 내 아이패드에 메시지가 떴다.

[도착했어요. 지금 카페 앞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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