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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주제는 '배첩'입니다. 교하에서 '장인과의 만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배첩장 선생님을 만나뵙고 인터뷰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인터뷰 자료를 요약해서 다른 사이트에 올려두었는데요, 뉴스레터를 통해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고 글을 다듬어 다시 공유합니다.
청주, 직지의 고장
청주는 직지의 고장으로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주가 직지의 고장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활자본을 포함, 각종 지류와 서책을 병풍 등으로 꾸며 보존하는 장인인 '배첩장'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직지와 직지의 수호자가 같이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충청북도 무형유산 배첩장 보유자 홍종진 장인이다. 국가무형유산 배첩장 보유자 김표영 선생님이 작고한 현재, 한때 다음 보유자로 지정예고까지 받았던 홍종진 장인은 국내 최고의 배첩장으로 알려져 있다.
15살 때부터 표구사에서 일을 시작하셨다고요.
그때 당시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일선으로 나가야 돼요. 돈벌이를 하러. 먹고 살기가 힘들으니까... 아침에 밥 먹고 점심에 고구마 감자로 떼우고 저녁에는 죽 먹고. 그것도 잘 먹는 사람이 그렇게 했어. 거의 다 굶기가 일쑤였지. (*홍종진 장인의 출생년도는 1950년대이다.)
청주표구사에서 일하시다가 서울로 올라가셨다고요.
크지 않았어요. 그리고 서울로 간 이유는, 아무래도 기술이나 뭐나 서울이 나을까 해서 서울구경하러 올라간거지.
(일행): 역시 사람은 제주도로 서울은 말로... (일동 웃음)
(*홍종진 장인의 첫 스승은 청주표구사의 윤병의 선생님이였다. 윤병의 선생님의 스승인 윤병세 선생은 제자가 여러명이였는데 김표영 선생이 그 중 한명이다. 김표영 선생은 국가무형문화재 배첩장 보유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고미술에 관심가지거나 표구를 맡기는 사람이 많았나요?
많았어요. 대한민국에 돈있는 사람은 다 서울로 올라왔잖아요.
당시 인사동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다른게 없었고 고가구 수리하는데하고 골동품하고 표구하고 화랑 뭐 이런 것만 있었지. 다른건 없었어요. 그래서 외국사람들이고 누구고 들어오면 대한민국에 거기는(인사동은) 다 몰렸다고 골동이고 뭐고 다 몰렸다고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이후 홍종진 장인은 청주로 돌아옵니다.)
(국내 유일의 배첩전수교육관이 바로 이곳이라는 얘기를 하다가) 아무래도 그렇다면 국가나 지자체 혹은 박물관에서의 의뢰가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많이 받지는 못하고요. 이제 문화재수리 같은 경우 입찰을 해야하는데, 무형문화재들은 입찰권이 없어
그렇다면 생계활동은 어떻게 이어나가고 계시나요?
그래서 이제 절이라든 사찰이라든가 뭐 박물관 같은데서도 2천만원 미만은 수의계약으로 할 수가 있어요. 그런 거 가지고 이제 먹고 사는 거지.
다행인 소식은 선생님의 아들분께서 청주대에서 배첩종목으로 박사학위를 따시고 폭넓은 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점이네요.
아, 꼼꼼하게 조사해오셨네. (맞아요) 아무래도 든든하죠.
다른 제자분은 전혀 없으신 거예요?
아무래도 부여의 전통대 (*전통문화대학교) 에서 강의를 하니까 (제자가 더 있다).
외주랑 별개로 교육활동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은 되게 희망찬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렇지만 이 종이의 앞면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뒷면을 만드시는 분이잖아요. 본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는 않으세요?
그렇게 아쉬운 건 없어요. 의뢰하는거를 나의 저기(능력)로 해서 완벽하게 만들어 드리는 것만 해도... (그리고) 작품 망가지면 몇십년 몇백년은 갈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거를 몇백년을 가게 할 수도 있고 또 유물로 남길 수도 있는 그런게 배첩장이 없으면 그게 되지를 않으니까 그것만 해도 그냥 자부심이 있지.
풀의 제작에도 엄청난 공을 들이신다고 유달리 얘기를 들었습니다.
일을 할 때 재료가 좋지를 않으면 암만 기술이 좋아도 수백 년 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재료를 싼거를 쓰거나 미리 준비해두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는 거.
좋은 재료라면, 전통재료만을 써야 될 텐데 문제는 요즘엔 수급이 안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어교라는거 그거는 이제 옛날에는 안 먹었었는데, (이젠) 그걸 전부 사람들이 먹으니까 (구하기 어렵다). 그게 또 맛있잖아. 그거 최고로 치잖아.
그래도 그런 수급처가 다 이미 있으시겠지요?
그렇죠 종이 같은 것도 이게 사서 쓰는 게 아니고 맞추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달라고 주문을 해야 돼요. 그냥 사서 쓰는 거는 뭐라고 그럴까 판매용으로 해가지고 제대로 만들지를 않아.
배첩을 하게 되면 우선 막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마음을 가라앉혀야 돼. 그냥 처음에 와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 100개 1000개를 해도 하나라도 버리면 안 돼요. 다 소중한 거니까. 그래서 우선 마음을 다스려가지고 차분하게 이렇게 가라앉히고서 일을 시작해요
새로운 걸 만들면, 잘못되면 버리면 되는데 이건 전부 유물이라는 얘기야. 유물은 한 개라도 버리면은 그거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이상으로 인터뷰를 종료하며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직지를 비롯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후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문화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방이나 경제 등에 비해 시급하지 않은 일이라고 치부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잦다. 애초에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문화유산을 보존해야하는 '당위성'은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도 과거의 배첩장들이 보존하는 문화유산을 물려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물려줘야 할 책무가 있는게 아닐까? 이 책무를 이어받아 물려받은 문화유산을 최선을 다해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홍종진 배첩장은 그 중심에 선 인물로써, 배첩장 종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국가적 지원이 더욱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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