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 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5)

군대에서 겪은 우울증 이야기

2023.02.01 | 조회 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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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별 에세이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5)

 

다시 돌아온 경비소대에서의 업무에 초반에는 그럭저럭 잘 적응했던 것 같다. 아버지 기수인 L형과 동기들은 이제 막 병장을 단 소대의 실세였고, 다들 꽤 괜찮은 인품으로 소대원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24개월을 복무하는 공군은 병장을 달고도 6개월을 더 복무해야 하니 소위 말하는 실세에서 물러난 ‘물병장’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울증 치료를 받다가 자청해서 소대로 돌아온 나를 소대 간부들이 기특하게 봐준 것도 한 몫을 했다. 나름 든든한 백이 있었으니 다른 병사들이 나를 마냥 함부로 대하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백이 있다는 것이 보직이동을 해서 온 관심병사를 다들 반가워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소대원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다. 막내 기수 병사들에게 자기 윗 기수가 소대로 보직이동을 온다는 것은 귀찮은 선임의 수가 늘어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후임이 한 명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막내 일을 떠맡길 후임이 줄어든다는 건 곧 자신이 막내 생활을 더 오래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모양새었다. 

 

자연히 나는 선임들뿐 아니라 후임들의 눈치도 보게 되었다. 그건 곧 끝없는 자기검열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선후임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걱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필요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런 과민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적절하게 분위기를 읽는 걸 어렵게 했다. 다시 나는 내가 만든 지옥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그 지옥의 문턱에 한 발만 걸치고 지낼 수 있었다. 내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겨울날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또는 뙤약볕이 살갗을 맹렬히 불태우는 폭염경보가 내려진 여름날의 13시부터 17시까지 소총 한 자루를 등에 매고 주말도 없이 부대 출입문이나 초소를 지키는 것이 마냥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선임이든 후임이든 어떤 이야기든 풀어놓아야 했다. 그 두서없이 풀어놓는 이야기 속에서 때로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 때 초소에서 나눴던 이야기 중에 두 가지가 선명히 기억에 남는다. 한 선임은 함께 근무를 설 때마다 내게 자주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날 근무를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나 눈물을 질질 짜고 왔든,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다른 선임들에게 얼마나 까이고 왔든 나는 늘 웃으며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 날도 같은 대답을 들은 선임은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K야, 그건 당위적인 얘기잖아. 네가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네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근데 현실은 아니야. 넌 누가 봐도 엄청 힘들어하고 있어. 현실이 그렇다는 건 그냥 그렇게 이야기하면 돼.”

 

아마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을 것 같다. 내가 힘들다고 얘기해도 괜찮았다.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람들이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근무 중 실수를 했을 때였다. 우울증 때문인지, 아니면 항우울제 때문인지 군 시절 내내 나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일을 곧잘 하는 것 같다가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컴퓨터 전원 플러그가 빠져서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데도 내가 컴퓨터를 고장낸 줄 알고 안절부절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하면 비슷할 것 같다.

 

나는 그때 처음 하는 업무를 하다가 그런 실수를 벌였던 것 같다. 어떻게 할 지 몰라 허둥대던 내게 선임이 대수롭지 않다는 양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 담에 더 잘 해봐.”

 

아,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구나. 누구나 처음엔 어설프구나. 그게 당연한 거구나… 그 후로 나는 이 말을 꽤 자주 입에 담게 되었다. 괜찮아. 누구나 처음부터 다 잘 할 수는 없지. 지금 실수도 해 봐야 나중에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어처구니 없는 실수가 잦았던 것은 명백한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그런 실수를 하는 내 모습을 용납하지를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건 앞서 언급했던 조금 비뚤어진 나르시시즘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실수투성이인 내 모습은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실수를 할 때마다 나는 필요 이상을 자책했다. 그리고 그 자책은 더한 피로감으로 돌아와 집중력을 더 악화시켰다. 

 

스스로를 실현할 힘이 없는 완벽주의란 이토록 자기파괴적이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고 그 완벽에 한 점의 흠도 남기지 않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결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모자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훨씬 건강하다. 적어도 상담심리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 전자의 경우가 충분한 힘과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완벽주의를 실천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유능할지는 몰라도 과연 진정으로 성숙하고 행복한 인간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다시 당위와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실수 한 점 없이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당위였다. 그러나 그 당위와, 매일 아침과 밤마다 항우울제 한 포를 삼키는 관심병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실의 사이에는 크레바스같은 괴리가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당위가 아닌 현실이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곳 또한 당위가 아닌 현실이다. 현실에 눈을 감고 당위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글쓰기 공동체 흰 종이 위의 날개 소속 작가입니다. 심리상담과 문학치료를 공부했습니다.

https://litt.ly/heena_day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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