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배우 정혜안입니다.
저는 종종 단어 하나에 오래 머무는 편입니다.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 한자 뜻을 살펴보다 보면 그 단어가 전혀 다른 감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나온 경험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가장하다’라는 단어가 한동안 제 머릿속을 맴돌았는데요!
가장하다. 거짓 가(假), 꾸밀 장(裝).
태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얼굴이나 몸차림을 바꾸어 꾸민다는 뜻.
뜻만 보면 다소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쉽지만, 저는 이 단어가 그렇게 단선적으로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하고 싶은 본질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입히는 하나의 ‘형식’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한다는 건 결국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의미이니까요. 어쩌면 포장지에 대해 고민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최근 제가 참여한 연극은 ’SF를 가장한‘ 애도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핫한, 출판사 무제 대표님과 장류진 작가님의 인터뷰에서는 신작 에세이를 ’여행 에세이를 가장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셨고요. 이렇듯 어떤 마음은 있는 그대로 보다 다른 형식을 빌렸을 때 더 멀리, 더 정확히 닿기도 합니다. (다들 어린 시절 ‘맛있는 음식을 가장한’ 야채들로 한층 더 건강해진 경험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혹은 포장하는 이유가, 조금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공들여 한 포장일수록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받는 자세도 달라지니까요.
그러다 문득, 이것이 연기와 닿는 면적의 파이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는 결국 나를 어떤 인물로 가장해 또 다른 진실을 꺼내는 일이 아닐까 하고요. 저는 그 형식을 빌려 내 안의 것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인물과 만나는(가장하는) 과정에서 매번 저라는 사람과도 새롭게 만나고, 저를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지점에서 저는 연기를 참 애정합니다. 나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순간들을요. 가장을 거쳐 드러나는 진짜 마음과 그 마음을 미세하게 감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앞으로도 계속 탐구하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지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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