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열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한 연극

2025.11.06 | 조회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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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안을 가진 사람

지극히 주관적인,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주관을 기록합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정혜안입니다.

 

며칠 전, 연극 공연을 마쳤습니다. <하우 투 링크>라는 제목의 SF 연극제 참여작이었어요. 뒤풀이를 마치고 오랜만에 어떤 마음의 무게도 없이 잠들었는데, 다음날 섬뜩함으로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거든요. ’오늘 몇 시까지 극장에 가야 했더라..?’ 어제 하루를 복기하고 나서야 싸한 느낌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알람을 맞추지 않은 이유는, 맞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음을… 분한 마음에 다시금 눈이 안 떠지는 척해보지만, 평소보다도 더 크게 떠진 눈은 감길 줄을 몰랐습니다.

그 이후로도 한 일주일 간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푹 쉬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침 7시부터 일어나 영화 한 편을 보고 운동까지 한 거 있지요? 왜 꼭 이렇게 푹 쉬려고 하면 오히려 말똥하게 깨어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다 곧 일상의 루틴을 되찾으면 다시금 꾸물거리고 귀찮아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놈의 청개구리 심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하우 투 링크>는 보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한 연극입니다.”

연출님의 출사표를 곱씹으며 새삼 ‘보고 싶다’라는 단어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한 단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보다’와 ‘싶다’가 합쳐진 단어라는 것을요. 굉장히 원초적이라는 감각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말이라,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지더라고요. 그저 보고 싶을 뿐이라는 게, 그냥 내 눈으로 한 번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요.

보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향해 한 번쯤, 수십 번, 셀 수 없이 품는 마음.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기억’에 대한 감각이었습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그러고 보니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추도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그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기억에 대한 무게감이 꽤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완전히 잊혀진 거야. 이승에서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 세계에서 사라져. 그게 ‘마지막 죽음’이지.” 

영화 <코코> 중에서

“다들 잊어버려." "나에 대한 걸 잊어버리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겹겠지. 얼굴도 생각나지 않겠지. 너희가 사라진 후엔, 더 빨리 잊히겠지. 그날 사라진 사람들 모두. 당연한 이치야."
"사람을 기억하는 건 살면서 주고받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야. 이제 난 너희랑 주고받을 게 없어. 생각보다 괜찮을 거야."

연극 <하우 투 링크> 중에서

잊는다는 말이 이렇게나 잔인하고 슬픈 말인 줄 몰랐습니다. 때로는 심한 협박처럼, 심지어는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너 어떻게 잊어버리란 말을 그렇게 쉽게 해?” 경이를 향한 친구들의 말이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억한다는 말은 참으로 따뜻한 말이 아닐 수가 없겠습니다. 이렇게나 애정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니요. 기억이라는 거, 꽤나 많은 노력과 사랑이 필요하더군요.

그리고 이에, 계속해서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예술가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술가의 사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듯,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이기도 하듯, 우리는 마음과 다르게 수없이 잊기도 하니까요. 어느샌가 나의 예술만을 주장하기보다는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맡았던 ‘재희’라는 인물에게 고마운 점이 많은데요. 프로덕션 초기부터, 캐스팅이 정해지고 난 직후부터, 이 작품을 통해 인간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재희와 저는 닮은 점이 참 많았거든요. 덕분에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재료들을 많이 가져다가 쓰기도 했고요.

인물과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재희에게 도움 줄 수 있는 것과 내가 재희에게 배운 것들. 저는 인물에게 많이 몰입을 하는 편은 아닌데요. 이번에는 유독 애틋하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아니면 인물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는데, 혹시 그런 까닭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다음 인물을 만나야 알 수 있겠네요!)

 

“마음을, 열어”

이번 공연의 파이팅 콜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재희가 저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거예요. 재희와 함께하면서 제가 차단을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재능이기도 합니다. 극중 비슷한 대사가 있습니다. “그게 제 재능입니다. 무관한 것.” 쉽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다 방어막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어요. 상처에 취약한 사람이라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이 세게 발동하는 겁니다. 그렇게 무관할 수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재희와 함께 풀어나간 지점이었습니다. 무관한 줄 알았던 내가, 스스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기까지, 그 과정이요. 재희가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마음을 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를 쓰면서, 재희에게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재희와 함께 성장한 시간들을 잊지 않겠다고요. 기억하겠다고요. 

 

보자, 재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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