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올해도 행복했네요!

열 두 번째 편지 / 십이월 마지막 주

2025.12.30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곳은 올해도 손 끝이 얼 만큼 추운 겨울인가봐요, 종종 걸려오는 전화에 여름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들이 들리니 그 곳의 추위를 짐작해봅니다.

시린 날씨에도 마음만은 따땃한 연말이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곳은 한 여름입니다.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에 있는지라 그리 여름의 날씨는 아니지만, 난생 처음 보는 크리스마스 컨셉의 비키니들이 진열장 빼곡히 놓인 걸 보니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가 맞긴 하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반바지를 입고 맥주를 마시는 산타 그림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이 섬에 온지 벌써 한 달 하고도 2주가 흘렀습니다. 그간 하루의 대부분은 작은 정원에서 보냈습니다. 한 집의 뒷마당일 뿐이지만 연못도 있고, 숲도 있고, 사계절 내내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로 꽉 찬, 드라마에서나 보던 백만장자 할아버지의 정원사로 일을 합니다. 생각보다 별 거 없더군요. 잡초를 뽑고, 예초기를 돌리고, 네 시간마다는 스프링클러를 옮기고, 개 밥을 주고•••. 가끔 정원으로 내려온 할아버지가 “나 이 풀 싫어. 뽑아.” 라고 말하면 뽑고, 다시 심으라면 심고, 뭐 그런 일상입니다.

물론 저에게 시키지는 않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 퉁퉁이 백만장자 할아버지도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열심히 일하니 ‘그 한국에서 온 조그만 여자애’라 부르며 나름 잘 챙겨주시곤 합니다. 이러다가 상속 제안이 들어오는 건 아닐지.

운이 좋게도 언젠간 정원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을 이렇게 이루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을 마주하던 만큼 꽃을 바라보고 있으니 허리 숙여 잡초를 뽑다가도 절로 웃음이 납니다. 아마 70살 즈음엔 지금처럼 정원을 가꾸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봅니다.

 

 한 해를 어떤 글로 마무리하면 좋을 지 고민하던 중 꽤나 마음에 드는 질문지를 찾았습니다. 한 해간 끄적였던 짧막한 글들과, 질문지 속 손이 가는 질문들을 골라 한 해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많이 보고싶네요! 따스한 연말 되길 -

 


<호주 첫 날!> _ 2025.03.24

 

호주에 오기 전 다짐한 한가지는-

밝게 살아가야지!

나의 마음과 곧게 편 어깨는 누군가의 편견을 없앨 수 있을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을테니.

 

사실 이건, 한 달이 지나고, 반 년이 지나 

이 글을 읽고 있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어깨 쭉 피고, 웃으며 살 수 있을 만큼

기죽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여자, 짐승, 아시아하기’

글마루 책꽂이에 새겨진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박완 선생님> _ 2025.5.2

 

이른 아침, 박완 선생님과 전화를 했다.

꽤나 우여곡절 끝에 잡은 약속이다.

 

역시나, 선생님은 나의 모든 것을 술술 말하게 만드신다.

내 꿈을 따라갈지, 당장 눈앞의 돈을 쫓을지.

질문을 하다 보니 그 질문이 어리석어 절로 답을 찾아갔다.

나는 알고 보니, 내 자신한테도 당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돈을 쫓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내 길을 가다 보면 돈은 절로 따라온다.’

그것이 맞다. 또 선생님은 현명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너무 스스로를 검열하지 마라.’

‘흘러가는 대로 살고, 많은 것을 경험해라. 한 곳을 깊게 파지 않아도 괜찮다.’

또 맞다. 나는 열여덟 살이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래. 보고 싶다. 건강해라.”

그게 다였다. 어떤 말보다도 담담하게,

나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말.

내가 떳떳한 삶을 살게 하는 그 대상.

 

 

<럭키걸 이채> _ 2025.08.08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어쩌면 나는 꽤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마운 일에 고마움을 느끼고

헤어짐에 슬퍼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사랑하는

 

그거면 된 게 아닐까,

또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신세지고, 눈물 흘리고, 사랑받으며 살고 있다.

행운이야!

 

 

<엄마> _ 2025.09.29

 

꿈에 엄마가 나왔다.

이야기보따리에서 오늘 밤 들을 이야기를 뽑으라는 엄마.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데이빗 이야기를 해 준다.

나는 그 무릎에 누워 이야기를 듣다가 스르륵 잠에 든다.

나 참 많이 사랑받고 자랐다, 싶다.

 

어제는 많이 속상했는데,

다들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게 참 서러웠는데,

그게 이렇게 꿈에 나온다.

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엄마가 나온다.

그럼 ‘너 소중한 사람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올해가 한 달 남았다> _ 2025.12.01

 

12월의 아침이 밝았다. ‘벌써 12월이네‘ 라고 이야기하기엔

올 한 해 나를 스쳐간 사람들과,

새롭게 도전한 것들과,

사랑했던 공간들과,

훔치듯 흘린 눈물이 떠올라 감히 그리 말할 수 없겠다.

열심히 버텨냈다.

 

그렇게 나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조차도 길을 몰라 헤메이고 있는 이 시간들이

10년, 20년이 지난 어느 날 보았을 때 꽃과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움이라면 좋겠다.

 

지난 날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더 나은 날을 말할 순 있겠지 -

남은 한 달, 고작 네 번의 월요일

그 30일간은 매일 아침 글을 적어봐야겠다. 

4번은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새해 선물도 보내야지.

 


2025년 돌아보기

질문 출처 : 인스타그램 @as.yours

 

  1. 올해 가장 잘 한 선택은 무엇인가? - 질문을 바꿔 올해 한 선택 중 후회하는 선택이 있냐 묻는다면, 그 어느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모든 선택이 그 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호주로 향한 것, 사람들을 사랑한 것, 그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난 것과 외로움에 취해 만나 기대었던 사람까지도, 그 때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겠지. 잘 살았다!
  2. 나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나답지’않았는가? - 그 어느 순간도 나답지 못했다. 아닌가, 모든 순간이 나였는데. 나다운 건 뭘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3. 나는 무엇 때문에 울었고, 무엇 때문에 울지 못했는가? - 할머니, 할아버지. 호주에 도착한지 일주일도 채 안된 4월 어느 새벽, 외로운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할머니에게 페이스톡을 걸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한참을 울었다. 내가 우니 할머니도 운다. 할아버지도 운다. 그 뒤로는 속상할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 않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울게하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단단히 마음먹게 하는 것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마 영원히 그렇겠지, 싶다,
  4. 올해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 늘 도망쳤다. 상처가 클 수록 더 깊게, 오래 도망쳤다. 대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어서 똑같이 상처주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사랑해보아야겠다는 마음 따위에 갈등하다가 결국은 회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나의 도망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다. 나는 아직 어떻게 해야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안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사랑하기에 상처받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또 사랑하기에 바쁘다. 
  5. 올해 나를 도운 사람에게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했는가? - 그렇지 않았다. 참 고맙다고 말하는게 서툰 사람이어서 늘 뒤늦게 후회하곤 한다. 도움 주고 사랑 주고 안부 물어준, 그리고 이 먼 곳 호주까지 발걸음해준 모든 사람들 - 가끔씩 전화를 걸어 심심한 노래를 불러준다거나, 된장은 있는지 참기름은 있는지 정말 진지하게 걱정해준다거나, 나의 모든 선택을 그저 지지한다고 말해준 - 에게 정말, 고 맙 다 !
  6. 나를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집착은 무엇이었나? - 질문들이 참 내 정곡을 찌른다. ‘무언가를 성취해야한다‘는 집착이 어쩌면 꽤나 오랫동안 나의 모든 선택의 기로들을 가로막았다. 성취 - 일 년을 살았으니 영어는 토익 900점, 뭐 그 정도? 호주 워홀이니 모은 돈은 한 일억 원쯤, 그것도 아니면 퍼머컬쳐에 일가견을 얻었다던가•••. - 어느 것 하나는 대단히 성취한 뒤에야 비로소 이 시간들의 유의미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성취욕보다도 사회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성공의 틀에 스스로를 매어놓았던 것 같다. 음, 지금 하는 후회는 ‘이 여행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었다면, 좀 더 놀걸!!!!!‘ (많이 놀았다.)
  7. 내가 원하는 삶을 정말 ’원하고’ 있는가, 그냥 말버릇인가? - 또 한번 정곡이 찔렸다. 이 곳에 온 뒤 나는 어느 이유인지 ’저는 내년에 독일로 가서 녹지 재생을 공부하고, 사막으로 가서 기아 문제를 해결할겁니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왜?’ 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틈도 없이 그렇게 머릿속에 굳어져갔다. 때로는 입 밖으로 꺼내었기에 현실이 될 수 있었던 것들 또한 있었지만, 반대로 입 밖으로 꺼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본질을 잃어가는 것들 또한 분명 있었다. 며칠 전 스스로에게 ‘왜 그렇게 살고 싶니’ 라고 열 번쯤 되물은 뒤에야 조금은 명쾌한 답을 얻었다. 지금의 나는 정말 원하는 삶을 꿈꾸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8. 그 일을 피한 이유는 ’두려움’인가, ‘불필요함‘인가? - 그렇게 열 번을 물었을 때 머릿속을 스친 건 ‘나는 정말 공부를 하고싶은가, 아니면 성취의 일환으로 내가 생각하는 멋진 답을 내놓고 싶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있어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을 피하기로 했다. 두려움과 불필요함이 적절히 섞인 결과였다. 나는 불필요함이라 믿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이었으리라 짐작할 것이다. 뭣이 중헌디 - 내가 원하는 삶에 남들의 시선을 조금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9.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 - 대학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대학 졸업장 없이도 내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 분명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이력서에 적힌 졸업한 대학의 이름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전문성에 집중하고, 그 전문성에 걸맞는 임금이 보장된다는 것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로 하여금 든든한 백이 된다는 것을 보았다. 전기 기술자, 배관공, 요리사와 정원사 등이 되기 위한 4년짜리 코스 - 유급 현장 실습과 더불어 주 1-2회 대학 출석이 일반적이다 - 의 전문직 자격증은 그 분야에 있어 호주 최고의 대학교를 졸업한 것 보다도 더 유의미한 경력으로 인정받았고, 음악가와 미술가, 농부들이 설 수 있는 지역 기반의 마켓들은 그들의 모든 도전을 응원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 어째 굶지 않고 잘 살아 남았다. 남들에게 증명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의심을 꺾어내기에 이 한 해는 충분했다.
  10. 말하고 싶었는데 끝내 삼켜버린 문장은 무엇이었나? - 집 가고 싶다
  11. 2025년을 한 문장으로 남길 수 있다면 어떤 말을 남기고 싶나? - 여행하듯 살고, 삶 속에서 여행해야지 -
  12. 내년의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 글쎄. 또 어딘지 모르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한참을 유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 지쳐 친구들에게 기대어 쉬었다가, 또 정신없이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해변가에 다다라 있지 않을까? 그럼 또 다시 여행을 시작하겠지만 - 올해보단 덜 울고, 운명의 단짝을 찾고, 마음이 좀 가벼워진 내가 있으면- 하고 기대하게 된다.
  13. 올해 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수고했어“라고 말해주었나? - 스스로에겐 셀 수 없이 되뇌었다. 다만 나를 위로하느라 바빠 당신들에게 이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올 한 해 살아내느라 애썼어요 - 진심으로요.

사랑담아,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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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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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울의 프로필 이미지

    너울

    1
    3달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지효의 프로필 이미지

    지효

    1
    3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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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fnf의 프로필 이미지

    fnf

    0
    24일 전

    글을 읽으면서 계절이 서로 다른 두 곳의 분위기가 잘 느껴졌습니다. 호주에서 보내는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더 궁금해지네요. https://fnf-games.io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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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보내는 편지, 이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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