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들 안녕하신가요?
‘How are you?’라는 질문을 들을 때 마다,
내 기분이 어떤지 고민하느라 쩔쩔매던 때가 떠오릅니다.
별 생각 없이 건넸을 인사에 그렇게 우물쭈물 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짧은 인사들 속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진심을 담아 당신의 안녕을 묻습니다.
첫 번째 편지에 담고 싶은 이야기는 나의 가장 초라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여자짐승아시아하기』 _ 김혜순
요즘따라 이 문장이 머릿속에 맴돕니다. 풀무 3년을 살며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장입니다. 내 피부에 스친 것들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호주의 이민자 비율은 27%입니다. 무려 4명 중 한 명이 여러 이유로 (대체로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넘어온 것입니다. 그 자체로도 놀라운 비율이지만, 거리와 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마주치며 체감한 이민자의 비율은 50%를 족히 넘었습니다. 모든 서비스직과 생산직은 물론, 건설직 또는 광산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아시아인들은 호주의 경제 시장 바닥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 특히 아시아인들이 채우고 있는 곳이 대체로 가장 덥고, 가장 춥고, 또는 몸이 상할 만큼 높거나 낮은 곳이라는 사실에 분노할 틈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곳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높은 임금과 꽤나 엄격하고 합리적인 법 아래 구성된 이 사회는 더 이상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였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자처한 이들은 충분한 급여에 만족하고 있고, 그들의 노동에서 비롯된 여유와 양질의 서비스를 누리는 호주인을 포함한 대다수의 서양인들은 그들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이상을 그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일개미가 여왕개미를 시기하지 않듯, 여왕개미가 노동하는 삶을 상상하지 않듯 그들은 각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릿속에서 이 모습들은 더 이상 차별이나 인권의 문제가 아닌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당연한 세상에, 결국 아시아인으로 섞여 살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그 마음이 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여왕개미를 꿈꾸는 일개미가 된 것 마냥 인지부조화가 일어난 것이죠. 아시아인이기에, 짐승이기에, 여자이기에 받은 차별이 아닌 그 당연함과의 충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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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풀무에서 꿈꾸던 낮은 곳에서의 삶이 그토록 거만하고 기만적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아무것도 겪은 것 없는 열일곱 살의 입에 담기엔 너무 허황되었던 그 가치들이 갑자기 나를 공격합니다. 전지구적 평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의 독립, 더불어 사는 삶.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게 느껴집니다.
이런 허무한 생각들이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전할까 고민하면서 글을 마무리짓습니다.
부디 허무한 마음만이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반의 반 년이 지났습니다.
한 계절이 지난 것이니, 이렇게 시간이 빠를 수 없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봄에 떠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에 도착했으니
행복할 수 밖에요. 🍁
3월, 일기에 썼던 '밝게 살아가야지!' 라는 다짐은 썩 만족스럽게 지켜내고 있습니다.
실은 몇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농담들에 섞일 수 없어 웃는 시늉을 하면서,
식당 주방에서 미끄러지면서 (좀 슬프다..),
박완 선생님의 전화에 울면서,
그래도 나름 잘 버텨냈습니다.
일기에, 휴대폰 메모장에, 여러 사람들의 메일함에,
대학 안 간 언니들을 인터뷰 한다는 인이의 설문지에-
끄적였던 글들이 위로로 돌아와 다시 웃을 수 있게 만들더군요
그런 글들을 한 데 모으려고 시작한 이 편지가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이 되거나,
'안녕하세요.' 라는 말처럼 그저 당신의 안녕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안부를 묻는 편지 하나쯤 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좋은 하루 되세요!
사랑 담아 이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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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ie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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