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뜨지 않는 마음

두 번째 편지 / 유월 넷째 주

202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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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그대에게

호주에서 보내는 편지, 이채 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들 안녕하신가요? 한 주간 여러분들과 함께했던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짐작해 봅니다.

 

당신들의 밤을 새는 일이 숨쉬듯 자연스러워지고, 몸 이곳 저곳이 다치고, 기대하고 실망했던 많은 순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은 공감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멀리에서 당신들의 삶을 응원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부디 어깨 쭉 펴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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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 '들뜨지 않는 마음'을 들으며 글을 적고 있습니다.
만약 내킨다면, 함께 이 노래를 듣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제 마음이 더 가까이 전해질까 기대해 봅니다.

 

저는 들뜨지 않는 마음을 배우는 중입니다.

지금까지의 안이채는, 어떠한 말에 느껴진 마음 그거 하나로만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순간의 설레임과 기쁨을 삶의 원동력 삼아 살아가던 저였습니다. 그리고 스물이 되어서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웃고 있지만 내일이면 사라질 지 모르는 그 웃음들과, 희망 하나 느껴지지 않는 희망찬 말들. 그런 것들 사이에서 보낸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들뜨지 않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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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지난 두 달 하고도 반이 지난 시간동안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모든 것이 소중했던 두 달입니다. 그 설레었던 시간들 중에서도, 들뜨지 않는 이채씨가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다정함에 깃든 유통기한을 알아가는 시간들 말입니다. 


 

2025년 3월, 비자를 발급받기도 전에 호주로 떠나는 비행기를 예매했습니다.

정해진 것이라고는 첫 번째 우프(WWOOF) 장소 뿐이었습니다. 고심없이 고른 세 명의 호스트 중 유일하게 답장이 온 한 작은 농장으로 가기로 결정한 뒤, 운전면허증도 없이(못딴 것 아님), 자격증이나 계획도 없이 호주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들뜬 마음 뿐이었죠. 퍼스에서 바닷길을 따라 다섯시간 가량을 남쪽으로 내려가니 도착한 그 곳은 마가렛 리버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미국 언니와 영국 오빠, 머리가 아름다운 흰색으로 샌 60대의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밤이면 모닥불을 피우고 파스타와 나쵸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춤을 추며 그 여유를 즐겼습니다. 머리가 복잡한 새벽이면 안개가 끼고 캥거루가 뛰노는 숲길을 앞만 보고 달렸는데, 그럴 때면 모든 생각이 정리되는 듯 했죠. 바다에서 래쉬가드 대신 비키니를 입고 수영을 하고(꺅), 생산적이지 못한 것들을 하며 오후를 즐기는 낯선 삶에 적응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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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적한 시골에서도 삶은 꽤나 바쁘게 흘러갔습니다. 화요일이면 어린 식물들을 돌보는 단체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손이 빠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는 다정한 손으로 시든 잎을 잘라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따스하게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종종 들려오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수요일이면 마을의 공유 정원에서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들과 잡초를 뽑았고, 목요일에는 카페에서 열리는 뜨개 그룹에서 양말을 떴습니다. 역시 사교가 목적이었던 그곳에서는 일곱살 아이도 나보다 영어를 잘 한다는 사실에 감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일주일 중 가장 사랑했던 시간인, 카페 봉사를 하러 마을의 공유 정원으로 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집에서 만든 빵과 케이크를 모아, 오천원에 그 케이크와 빵들을 커피와 함께 파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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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네 시간, 우핑까지 끝내고 나면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 지 몰랐던 저에게는 그게 오히려 나았습니다. 제가 해야했던 일은 대부분의 일은 페인팅과 청소였습니다.

청소.. 일주일 내내 청소를 하고 나면 ‘내가 온 곳은 오가닉 팜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죠. 풀무 청소검사를 매일 견뎌야 하는 기분이었달까요. 아연이가 참 좋았습니다.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순서로 청소를 해야한다', '걸레가 더러워지면 다른 쪽 면으로 닦아야한다', '청소기를 쓸 때는 먼지가 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한다.' 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고 있다는 말 한 마디 정중하게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이었기에 그저 축 처진 표정으로 "Yep"을 외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적당한 거리 속에서 안부를 묻던 어느 날,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집안일을 돕던 가족들의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손을 씻던 중,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데이비드와 마주친 것입니다. 데이비드는 수건을 두른 상태였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 잔뜩 화가 나버린 것이죠. 소리를 치며, "이 집에 맘대로 들어오지 말고, 앞으로 밥은 네가 스스로 해먹어!"라고 말했습니다. 멘탈이 유리는 커녕 물렁물렁 순두부였던 저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는 집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혼자 밥을 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이제는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나도, 그 곳의 사람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단어를 설명해주는 것에 지치고, 한국에 대해 궁금했던, 혹은 궁금하지 않아도 물어봤어야 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끝난 뒤, 마치 유통기한이 다 된 요거트마냥 편안하지 않은 공기가 흐른다는 것을 느낀 것이죠.

 

때마침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화요일마다 식물 식재 봉사를 함께 하던, 중에서도 가장 따듯해보이던 중년의 아주머니 루스였습니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가득 나는 강아지와 함께 것이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머물 있는 별장이 있다며, 내가 오기를 환영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작은 카라반에서 지내던 저는 사실, ‘크면 얼마나 크겠어!’라는 작은 의심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근데 이게 , 혼자 머물게 될 별장은 한국에 있는 우리 집보다 집보다 컸고, 귤이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 예쁜 정원이 (이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을 함께 먹지 않겠냐는 그녀의 정중하고 따스한 제안에 잔뜩 행복해 했습니다.

공주가 되
공주가 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은 꽤나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 따스한 사람들은 그 사랑으로, 무언가 말하고싶어 입이 근질거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단어들을 공책에 적어 예문을 빼곡히 적어주고, 그 단어를 사용할 때면 쏟아지는 칭찬들을 받으며 어쩌면 난 그들 가족의 일부가 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시내에 나가 샌드위치를 사 먹은 날이었습니다. 모두가 따듯하게 데워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혼자 딱딱한 돈까스를 먹으며 영어를 못하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에 속상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이 서러움을 털어놓으니, 루스와 마크는 '데워주세요' 라는 영어를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비장한 준비 끝에 함께 브런치 카페로 향했습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무사히 주문을 마치자, 마크는 "Good on you, Yichae!" 하며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럼 전 또 다시 세상 행복한 어린이가 되지 않을 수 없지요. 알고 보니 제 샌드위치는 차가운 메뉴였던 것이 반전이었습니다만, 행복했으니 되었습니다 :)

루스는 마을 합창단의 리더였습니다. 그들의 집에는 늘 음악이 흘렀죠. 기타 반주와 함께 흥얼거리던 권나무 선생님의 노래에 더해진 플룻 연주가 참 아름다웠던 첫 날 밤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비틀즈와 한영애, 밥 말리와 권나무를 넘나드는 연주에 하나되었던 순간들은 오랫동안 살아갈 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그들의 개 또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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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또 다시 때가 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장을 보며 음식을 적게 산다고 늦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저녁을 함께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내 영어 실력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씩은 저를 참 씁쓸하게 만들었음에도, 내가 그들의 가족 비스무리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에도 지금도 최선을 다해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고, 공부했고, 사랑했기에 어느 것도 후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도 또 다시 운이 좋게도 인연이 이어져, 첫 번째 가족의 딸의 집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퍼스 시내에 있는 아름다운 집에서 또 다시 신세지며 일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리고 스스로를 작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힘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친절함의 유통기한이라고 믿었던 한 달을 넘길 수 있을 만큼은 자랐습니다.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을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의 일상 또한 이 편지에 담을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또 다시 수 많은 선택지들 사이에서 길을 헤메이고 있습니다. 돈, 경험,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를 잃지 않는다는 조건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앞에 놓인 고민들은 무엇이려나요.

 

망고 요거트를 살지, 딸기 요거트를 살지.

도서관에 걸어서 갈지, 2천원이나 하는 버스를 탈지.

합격할지도 모르겠는 청소 일을 시작할지 말지.

 

저는 이런 작은 고민들에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들뜨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말은, '더 오래 사랑하고 싶다'의 다른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사랑에 총량이 정해져있다면, 세상 모든 것들을 아끼고 아껴 더 오랫동안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나의 사랑하는 당신들에게도요. 

 

들뜨지 않은 다정한 안부를 물으며 당신의 한 주를 응원합니다.

다들 안녕하신가요? (다정다정)

 

좋은 하루 되세요.

사랑 담아 이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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