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재팬인사이트>의 YJ입니다.
최근 한국의 많은 기업, 투자자분들과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장이 정체된 것 같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입니다. 저는 그럴 때 현재의 일본 시장을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시라고 권합니다. 단순히 가깝고 규모가 큰 시장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인구 구조의 격변’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맞이한 일본의 현재 모습 속에서, 우리가 마주할 미래의 기회와 위기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및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고령화’, ‘1인 가구’, ‘지방 소멸’이라는 거대한 세 개의 물결이 어떻게 일본 소비 시장을 바꾸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리세일’, ‘구독’, ‘지역 밀착형 소비’라는 3개의 키워드를 실제 사례와 함께 파고들어 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현재 일본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2025년 문제'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1947~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가 전원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층으로 진입하면서 발생하는 사회보험 부담 증가 및 경제를 지탱할 노동력 부족 문제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2025년 문제. 출처: 일본재단
20년 전인 2005년 즈음과 비교해도 일본의 노인 인구는 1천만 명 이상, 치매 인구는 2배 이상 늘었습니다. 그야말로 팩트 폭격이지요. 일본은 명확하고도 그 어떤 국가보다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2050년이 되면 '일본인다운 일본인'이 과연 얼마나 남을까?"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대기업 오픈 이노베이션팀, 스타트업, 학계를 가리지 않고 들려올 정도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몇 년 앞선 미래다." 식상할 수 있는 이 말이 적어도 인구 구조 변화와 그에 따른 소비 시장의 지각 변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출생 인구 감소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도(중위 연령 일본 49.8세/한국 45.6세)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나라이기에, 현재 일본의 소비 생태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곧 한국의 가까운 미래 비즈니스를 그려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 봅니다.
Part 3. 새로운 소유의 규칙: ‘리세일 혁명’과 ‘구독 사회’
“열심히 일해 내 집·내 차를 산다.” 일본 고도성장기의 교과서였죠. 하지만 2025년의 일본 MZ는 이 문장에 쉽게 설레지 않습니다. 불확실성은 길어졌고, 물가는 꾸준히 올랐고, 신품은 더 비싸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소유의 고정비는 낮추고, 경험·현금흐름·가치 보전은 최적화하는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갑니다. 그 교차점에 리세일(Resale)과 구독(Subscription)이 있고, 둘은 더 이상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생활의 규칙이 됐습니다.
3-1. “꼭 새것이어야 해?” — 리세일이 만든 가치 소비의 표준
① 시장의 온도
일본 리유스(재사용) 시장은 2023년 3조 1,227억 엔, 전년 대비 +7.8%, 2009년 이후 14년 연속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팬데믹 이후 발길이 다시 오프라인으로 돌아오며 오프라인(B2C) 매장 판매는 +7.5%, 온라인 B2C는 +12%로 확대됐습니다. 이제 중고는 불황이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대안이 아니라, 합리성·환경·취향이 결합된 일반적인 선택지 중 하나입니다.
② 생활 속 루틴: “사는 순간부터 파는 걸 생각”
젊은 소비자는 구매 → 사용 → 리세일(처분) → 재구매의 루프를 애초에 설계합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라도 감가 방어력이 좋은 브랜드·모델을 고릅니다(카메라·소형가전·하이엔드 패션 등). 여기에 빈티지나 단종 라인을 ‘발굴’해내는 재미가 덧붙죠. 이 루틴을 생활 반경으로 끌어낸 주역이 ‘일본의 당근’이라 불리는 메루카리(Mercari)입니다. “찍고–올리고–판다” 로 3분만에 출품이 끝나는 심플함, 익명 배송·에스크로로 신상 노출 및 대금 미지급 같은 유저들의 불안을 설계 단계에서 이미 차단, 판매된 대금의 현금화는 물론 자사 페이먼트 시스템인 메루페이·메루카드로 일상적인 결제·신용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2023년 IR 기준 일본 내 MAU 2,300만 이상으로 “안 쓰면 메루카리에 올려(メルカリに出す)”가 일상어가 된 이유입니다. 초보 판매자를 위한 촬영 가이드·가격 추천·설명 템플릿 같은 ‘가이드 레일’도 대중화를 이끈 보이지 않는 디테일입니다.
③ ‘신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진위감정×중재×규칙
C2C에서 가장 비싼 비용은 의심입니다. 메루카리는 2024년, 외부 감정사들과 연동한 유료 진위감정 서비스인 ‘안심 감정(あんしん鑑定)’을 도입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출품 기본설정에서 감정 옵션을 통합해 위조 리스크를 구조적으로 낮추는 쪽으로 한 걸음 더 갔습니다. 가품 판정 시 거래 자동 취소·환불(반송비 판매자 부담)을 시스템으로 확보하니, 소비자는 심리적 비용 없이 고가 중고에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핵심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겨도 플랫폼이 잡아준다.” 신뢰는 후기(리뷰)만으로 쌓지 않습니다. 규칙과 절차, 그리고 중재 역량이 신뢰를 ‘제품 기능’으로 만듭니다.
④ 브랜드의 반격: 공식 리세일·수선·순환으로 컨트롤하기.
리세일이 생활화되자, 브랜드도 2차 유통을 스스로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 ZOZOUSED: ZOZOTOWN 안의 2차 유통 허브로 상시 약 70만점, 6,500개 이상의 브랜드를 취급하고, ‘교체 할인(買い替え割)’으로 신품(1차)–중고(2차)의 순환을 같은 플랫폼에서 돌립니다. 포인트는 재고·가격·회전 데이터가 한곳에 모이는 구조라는 것이고, 이렇게 모아진 데이터가 가격·회전·LTV의 정밀도를 올려놓습니다.
- RE.UNIQLO 수선·리메이크·리사이클을 묶은 RE.UNIQLO는 “싸게 많이 팔자”에서 벗어나 “오래 잘 입을 수 있는 경험”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매장 내 수선 스튜디오 확장도 같은 맥락으로 보이고요.
3-2. “소유는 부담, 이용은 가볍게” — 구독이 여는 경험 포트폴리오
① 시장의 체온: OTT 이후, 생활 전반으로 확장
정기배송을 제외한 B2C 7대 구독 분야(패션·식료품·라이프·레저/엔터테인먼트·정보 콘텐츠·교육·의료/헬스)는 2023년 기준 약 9,430억 엔(전년 대비 +5.2%)으로 상승했습니다. 영상 OTT(넷플, 디즈니플, 아마존 프라임, 애플 티비, 유넥스트 등등)가 포화에 이르렀다면, 그다음은 패션·라이프·헬스로 분화·고도화되는 중입니다. 핵심은 ‘정기결제’가 아니라 문제해결의 위탁—소유의 번거로움(보험·세금·정비·보관·수선·코디)을 사업자가 흡수하는 구조입니다.
② Case: 에어클로젯(airCloset) — “옷장이 아니라, 스타일링을 구독”
어떻게 쓰나요? 취향·사이즈·TPO: 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를 앱에 입력하면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3벌을 큐레이션해 보내줍니다. 입어보고 피드백을 남기면 AI가 취향을 학습해 다음 추천의 정확도가 오르고, 마음에 든 옷은 할인가로 구매 전환도 됩니다. “옷은 많은데 입을 게 없다”는 만인의 고민을 선택권 제거로 풀어낸 서비스죠.
이들의 운영 포인트
- 데이터 레코드(착용·평가·반납 사유·핏 불만)를 구조화해 추천 엔진을 지속 개선
- 오염·파손에 대한 안심 장치(보험·면책 옵션)로 이용 장벽을 낮춤
- 브랜드에겐 ‘입어보고 경험하는’ 최고의 체험 마케팅 채널
2024년 6월 기준 월정액 유료회원 3.7만명, 소속 스타일리스트 300명 이상, 등록 회원(무료 포함) 100만명 이상. 누적 규모가 쌓일수록 개인화 정확도가 함께 강화될 거고요.
③ Case: KINTO(토요타) — “차를 소유하기보다 운영한다”
가치 제안은 간단합니다. 자동차를 가지기 위한 총 소유비용(TCO)—자동차 보험·세금·정비비용까지—를 월 정액으로 묶습니다. 소비자는 예측 가능한 지출로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얻고, 사업자는 회수-재정비-재배치(리버스 로지스틱스)와 예측 정비로 수익성을 관리합니다. KINTO는 2024년 1월 누적 신청 10만 건을 넘겼고, 2025년 3월기 첫 흑자로 전환했습니다. “자동차는 월 구독으로 운영하는 자산”이라는 인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되는 중입니다.
4. 한국 기업을 위한 제언 — 디테일에서 승부가 갈립니다
4-1. 리세일은 ‘가격’이 아니라 ‘프로세스’
명품·스니커즈·하이엔드 오디오처럼 고가·고위험 카테고리는 감정–검품–등급화가 필수입니다. 가품과 분쟁에 민감한 일본에서는 전문가의 공식 감정, 영수증·시리얼·이미지의 AI 판독, 의심 거래를 미리 걸러내는 비율 같은 백엔드 KPI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플랫폼과 리테일만이 공적 신뢰를 축적합니다.
4-2. 구독의 성패는 ‘해지 UX’
2022년 개정된 일본의 특상법 체계에서 최종 유저 확인 화면 고지의무(정기·해지 조건, 제공기간, 총지불액 등)는 기본입니다. 유저의 떠날 권리를 방해하거나 방지하는 어둠의 패턴은 단기적 ARPU를 올릴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 신뢰 관계를 갉아먹는 독(毒)입니다. 내부 가이드로 “해지 3클릭 이내” 같은 자율 기준을 두고, 약관·요금표시 가독성 개선을 제품 로드맵에 넣으시길 바랍니다.
일본에서는 리세일×구독이 이미 일상의 기본값입니다. 한쪽에서는 메루카리를 통해 “안 쓰는 건 곧 자산”이라는 감각이 자리 잡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KINTO가 보여주듯 “소유보다 운영”의 철학이 생활을 가볍게 만듭니다. 여기에 ZOZOUSED·RE.UNIQLO의 순환 설계와 오프라인 신뢰망이 맞물리며, 경쟁의 축은 가격에서 신뢰로 옮겨갔습니다. 이 무대에서 한국 기업이 승산을 찾으려면, 반짝이는 프론트보다 보이지 않는 백엔드를 먼저 완성해야 합니다. 감정·검품·중재로 신뢰를 보증하고, 데이터로 개인화를 정밀하게 다듬으며, 회수해서 재정비, 그리고 재판매가 끊김없이 이어지는 운영 코어를 갖추는 것.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일본 시장과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워집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