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다시 읽기

구독자 님에게 보내는 복음, '열두 제자의 실패' 이야기 (2)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과 '예수의 제자도' 다시 생각하기 (2)

2024.01.15 | 조회 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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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서간

가슴과 감성으로만 받아들이고 무작정 믿고 보는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 머리와 이성으로도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현대인의 성숙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가이드. 지적인 교양 있는 비신자 성서 독자, 예비 신자와 초신자, 신앙 생활과 성서 읽기 또는 신학과 교리의 문제로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뉴스레터.

 

 구독자 그대여, 저는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 성서가 기록되고 전해진 과정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협력자 구독자 그대여,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저의 형제 자매가 되신 교우 분들께 "우리가 '신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성서 가운데 어떤 책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는지 아세요?" 하고 지나가듯이 질문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답은 마태오 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이 아니냐는 답변이었습니다. 신약 성서의 순서가 그렇게 배치되어 있으니, 그렇게 답하시는 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복음서의 기록 연대나 성서학에 대한 공부를 조금 해보신 교우 분이라면 이렇게 답하셨을 겁니다. "마르코 복음이 저작 연대가 복음서 중에 가장 이르다고 하니, 그럼 당연히 마르코 복음이겠죠?"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정답은 아닙니다. 사실 신약 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내용은 사도 바오로가 쓴 서간문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복음서'가 기록물의 형태로 나오기 전부터, 이미 '복음' 자체는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며 모든 제자들의 대표 격인, '열두 사도'에 의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전파와 그리스도인 공동체 형성 이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비록 예수님의 직계 제자는 아니지만 환시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교 박해자에서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열정적인 추종자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앞장 서게 된 인물,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기록들은 서간문, 즉 편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그가 전도하고 이끌어 형성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 교회들에 보내는 권면이 담겨 있으며, 그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그들의 믿음에 대해 격려하기도 하는, 교리와 신앙에 대한 도움을 주는 편지들입니다. 이른바 '바오로 서간'은 신약 성서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중대한 기록물이고,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교의 형성과 교리에 대해 많은 증언을 담고 있기에, 신약 성서 가운데에서도 특히 역사적인 중요성이 높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목적, 교리적 교훈과 표준을 제시하기도 하는 소중한 기록물들입니다.

 실은 구독자 님 그대에게 보내는 이 서간도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 형태를 빌려 작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 읽기를 자주 하며 성서를 항상 가까이 두고 있는 그대라면 이미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겁니다.

 

 물론 당시에는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 또 역시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기둥'인 요한 사도와 '주님의 형제(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가까운 일가 친척, 사촌지간으로 보거나 요셉이 이전 혼인에서 낳은 자식으로 보거나, 또는 친형제지간이며 예수님 바로 다음 친동생으로도 보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 등 보편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야고보를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닌 가까운 친척으로 보고 있습니다)'로 알려진 야고보는,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다교'의 정통을 고수하며, 유다교의 새로운 본질을 발견하고 새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 '진정한 유다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당대 고대 1세기 전후의 '유다교' 신자들이 스스로를 '유다교'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정체화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그들의 생활 양식이자 일상의 습관이었고, 삶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대한 민족적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생활'과 '풍습'은 '신앙'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근본이란, 오직 단 한 분이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 분께서 친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첫 번째 백성으로 삼으셨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그 분의 활동을 보여주시는 한편, 이스라엘 민족을 일종의 '본보기'이자 '모형'으로 삼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까지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한 역사를 계획하시고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맏아들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들은 스스로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이에 대한 소망을 품으면서 그들에게 행해진 여러 제국들의 박해에 대해 하느님께서 친히 구원의 손길을 내미실 것이며, 하느님께서 예전 이스라엘 왕국의 유명한 예언자 엘리야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인 다윗과도 같은 왕을 새로 보내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이민족의 통치로부터 해방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기대하고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고 하여, '묵시적 종말론'으로도 불립니다.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은 흔히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왕좌'를 약속한 다윗의 후손인 새로운 임금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대개 이러한 이를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께 친히 '기름 부음'을 받은,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왕과 대제사장을 선출할 때 행해지던 성유 도유 의식을 의미합니다.) 장차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을 제국의 억압과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이를 기다리는 신앙은 흔히 '메시아 신앙'이라고도 부릅니다. 모든 유다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유다인들은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서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주권 국가를 일으킬 '왕 같은' 메시아를 소망했습니다. 일부 유다고 분파에서는 대사제와 같은 메시아와 왕 같은 메시아를 모두 소망했습니다.

 

 메시아의 그리스어 표현은 '크리스토스'입니다. '기름 붓다'는 의미인 히브리어 '마샤흐(מָשַׁח)'를 어근으로 하고 있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마시아흐(מָשִׁיחַ)'이고, 기원 후 1세기 전후로 유다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생활 표준어 아람어로는 '메시아(משיחא)', 그리고 신약 성서의 기록에 사용된 코이네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라고 옮겨 쓰고 읽습니다.

 신약 성서는 모두 당대 로마 제국 세계의 공용어이던 코이네 그리스어(흔히 성서의 '헬라어'라고도 부르는 말입니다)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읽는 한국어 번역 신약 성서에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그리스도를 번역하면 메시아라는 의미이다' 하는 식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그리스어보다는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시고 들으셨을 걸로 추정됩니다. 예수께서 직접 그리스어로도 말씀하시며 가르치실 때 사용하셨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다면 아마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혼용하여 모두 사용하시되, 주로 사용하시던 언어는 아람어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사도 바오로를 포함한 사도들의 본래 뜻은 '유다교'라고 불리우는 '종교'와 '관습'과 '율법'을 모조리 부정하고,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세우는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 형성 당시에만 해도 유다교의 작은 소수 분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등 신약 성서의 기록이 증언하듯, 각 지역마다 흩어져 있는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믿고 받아들이고 따른 이들을 이후에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하여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이 초기의 '1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세대가 지난 이후 드디어 문서로 기록되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쓴 것이 분명하다는 데 학계의 의견이 거의 일치하는 서간문 중 일반적으로 가장 기록 연대가 이른 것으로 알려진 것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간'입니다. (불행히도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말은, 사도 바오로가 직접 쓰지 않은 서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된 서간으로 통용되고 전해져, 현재 우리가 가진 신약 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바오로의 이 첫 번째 서간문은 보통 '테살로니카 1서', 혹은 '데살로니가 전서'라고도 부릅니다. 이 서간문은 기원 후 약 51년을 전후로 하여 작성되어 테살로니카 교회에 보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테살로니카 1서는 신약 성서 가운데 가장 기록 연대가 빠른 문서이자, 사도 바오로가 쓴 것 중에 우리에게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 문서 중 가장 기록의 시기가 이른, 이른바 '최초의 서신'이자 '최초의 신약 성서'입니다. 이미 테살로니카 교회가 세워진 상황에서 작성된 편지임을 볼 때,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진 시기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이 일어났으리라 추정되는 서기 33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서기 40년대와 50년대에는 이미 복음의 선포와 선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여러 지역에 교회 공동체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예수께서 부르신 첫 번째 제자인 열두 사도가 어찌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복음서 사가는 왜 열두 사도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구독자 그대가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여기서 먼저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는 학계의 공통 견해는, 기원 후 67년 경에 바오로 사도가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최초의 '기록된 이야기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의 학계 내 대다수가 추정하는 저작 연대는 기원 후 65 ~ 75년경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늦은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가 작성되고 있을 무렵, 그리고 작성이 끝나고 각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들에 전해지고 읽히며 봉독될 때 사도 바오로는 이미 죽음을 맞이했거나, 아직 살아 있었더라도 그 기록된 복음서를 직접 읽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열두 사도의 대표이자 예수께서 제자 중 첫째 가는 이로 삼으시고 '하늘의 열쇠'를 맡기셨던 '교회의 반석', 사도 베드로도 기원 후 67년 또는 68년에는 이미 순교하여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즉, 마르코 복음서는 아무리 이르더라도 주요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나 또는 세상을 떠나기 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기록 되었을 것이고, 사도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이후 제2세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 내에서 주로 읽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전까지는 기록된 복음서가 없이 '복음'이 입에서 입으로, 말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거룩한 책인 '성경'이 먼저가 아니라, '성전', 즉 '거룩한 전승'이 먼저였습니다. 그 후에 그 여러 성전들을 정리하여 비로소 기록물로, 책으로 만든 것이 '성서'이고, 그러한 성서들은 처음에는 여러 권으로 나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현대의 독자들은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모든 성경을 이루는 책이 하나의 묶음으로 있는 '한 권의 책'으로서의 성경을 머릿속에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잊어버리기가 쉽지만, 우리가 책을 이러한 형태로 읽고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전과 보급이 널리 이루어진 다음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 시대의 그 누구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구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의 목록과 형태조차도 저마다 달랐고,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바로 이해하고 성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독자인 우리들은 이 '기록된 복음'들을 읽을 때, 마치 기자가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 적듯이 사실을 기술했을 것이라 오해해서는 안 되며, 이것을 특정한 인물에 대한 '현대적 전기'처럼 읽어도 안 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성' 만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아무리 이르게 보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 이후 30 ~ 40년 뒤에 기록된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기억력을 지닌 사람이 작성하더라도 모든 내용과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2세대 그리스도인인 복음사가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과 그 분의 모든 언행들은 '전해 들은 이야기', 즉 '구술 전승'입니다. 그리고 전승은 그 특성상 조금씩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시가 문자 문화가 아니라 구술 문화였고, 구술과 전승의 형태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하며 전해지고 기억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불명확하거나, 전승을 전해 받은 공동체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초기 창립자나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강조되는 내용도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예컨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한 바오로 사도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듣는 복음과 유다 지역에 있는 유다인들이 듣는 복음은 강조점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 대해 익숙한 사람, 우리가 흔히 '구약 성경'이라 부르는 히브리 성서의 내용에 친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의 선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히브리 성서에서 예언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취되었다는 걸 강조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유다인들의 전통과 율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그러한 배경에 대해 하나하나 일러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전승을 접하고 저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성향이 달랐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그 안에 담긴 내용, 즉 복음을 잘 보여주고 (문맹인 신자들을 위해 대신 읽어주는 이들을 고려한다면) '잘 들려주고' 싶다는 목적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작성했습니다.

 

 즉, '복음서'의 장르는 현대인인 우리가 생각하듯 '현대적 전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뉴스(News, 소식)'도 아닙니다. 복음서의 저자들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신자들과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공동체의 신자들에게 강조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첫 번째 사도들은 대부분이 순교하여 세상을 떠난 다음입니다. 교회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였던 이들이 사라진 교회 공동체 내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과 그 분의 행적과 말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복음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구독자 그대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가 첫 번째 제자 집단인 열두 사도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이유를요. 대부분 늙거나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게 마르코 복음사가의 목적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독자 그대여, 우리에게 이제 마르코 복음서 저자의 상황과 의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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