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다시 읽기

구독자 님에게 보내는 복음, '열두 제자의 실패' 이야기 (1)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십자가의 길'과 '예수의 제자도' 다시 생각하기 (1)

2024.01.14 | 조회 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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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서간

가슴과 감성으로만 받아들이고 무작정 믿고 보는 맹목적이고 반지성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 머리와 이성으로도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현대인의 성숙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가이드. 지적인 교양 있는 비신자 성서 독자, 예비 신자와 초신자, 신앙 생활과 성서 읽기 또는 신학과 교리의 문제로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뉴스레터.

 

 사람들에게서도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파견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성령의 영감에 사로잡혀, 거룩하신 성 삼위일체 안에 갇힌 수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열성적인 추종자이자 '성서 덕후'가 된 저 이재인과,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에 선포된 우리 하느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랑하는 우리의 협력자 구독자 님에게, 그리고 그대의 가족과 그대가 매 주일마다 모이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하는 교우 분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구독자 그대를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 예수님과 모든 성도를 향한 그대의 사랑과 믿음을 제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주시는 성령의 목소리를 깨달아, 그대가 더욱 활발히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믿음의 길이란, 바로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 곧 '십자가의 길'과 마르코 복음서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만큼이나 십자가의 길에 대해 무겁고 중대하게 다루고 있는 복음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대가 마르코 복음서를 이미 모두 읽었을 것으로 압니다. 어쩌면 아마 그대는 복음서를 읽는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둔감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여러 차례 탄식을 하거나 한탄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직접 부르시고 첫 번째 제자로 삼은 열두 사도의 생각과 언행이 어찌 이렇게 둔하고 어리석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여, 저는 그대가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에 스스로 헌신함을 믿고 있기에, 큰 기쁨과 격려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이며 처음에 거두신 제자이며 또한 모든 제자들의 대표 격인 열두 사도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고 엉뚱한 말과 행동을 그토록 자주 일삼았는지 그대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네 권의 정경 복음서가 성서로 전해져 오고 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도 기록 연대가 가장 앞선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물론, 병행 구절이 있는 다른 두 권의 복음서인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와 루카에 의한 복음서의 내러티브도 약간 인용하여 대조하기는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가족이 된 구독자 그대여, 그대가 성서에 대해 조사하거나 공부한 바가 있다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 이 세 권은 '같은 관점'을 지녔다고 하여, '공관 복음서'라고도 불립니다. 이것은 이 복음서 세 권이 같은 내러티브를 공유하는 '이야기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만을 모은 일종의 어록집이라 할 수 있는 '말씀 복음서'에 대조하여, (말씀 복음서로는 이른바 'Q 문서 가설'에 의하여 존재 여부가 추정되지만 애석하게도 사본은 남아 있지 않은 'Q 복음서'와, 일반적으로는 정경의 네 복음서보다 비교적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마스 복음서'가 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에 따라 토마스 복음서가 좀 더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으리라 추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아직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토마스 복음서의 저작 연대를 아무리 이르게 잡더라도 기원 후 100 ~ 12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전승을 기록한 복음서, 곧 이러한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를 '어록 복음서' 혹은 '말씀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서에 실린 네 권의 복음서는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 복음서'라고도 불리는데, 이 가운데 전체적인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굉장히 유사하고 병행 구절이 많은 앞의 세 복음서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는 특별히 '공관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세 권의 복음서에 비하여 비교적 이야기의 연관도와 형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에 의한 복음서는 약간 특별하고 색다른 복음서입니다. 그대여, 저는 그대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 한 분에 대한 '하나의 복음'이 어떻게 이렇게 '여러 형태의 복음'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는지 무수히 많은 궁금증이 들었을 걸로 짐작합니다. 그대에게 복음서가 당혹감을 주었다면, 복음서의 어떤 일화는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된 바와 다른 상황과 맥락에서 나오고, 이야기의 배치 순서가 다른가 하면, 복음서마다 이야기하는 내용들조차 때로는 모순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여, 저는 그대를 이해합니다.

 

 '줄거리에 연속성이 없는 이야기'들은 현대의 독자인 우리에게 이해를 어렵게 하곤 하는 요소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그 사실성과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가 된 구독자 그대여, 그대가 갖는 의심은 신앙에 해로운 것도 아니고, 그대가 가진 믿음의 불성실함이나 죄의 표징이 아닙니다. 그대가 가진 의문이나 의심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그 이유를 간략하게나마 말해보겠습니다. 근대와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논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시되는 시대인 21세기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정확한 '사실'을 추구하며, '사실'이 아닌 것은 흔히 '거짓'으로 치부하곤 하는 사고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과학적' 사고 방식에 길들여진 나머지, '문자적 사실 근본주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대가 이로 인해 신앙이 흔들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가 그런 흔들림을 겪은 걸 모두 이해합니다. 그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구독자 그대여, 혹시라도 의심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면 그대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문화와 풍조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모든 텍스트(Text, 문자)는 시대라는 '콘텍스트(Context, 맥락)' 내에서 읽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구독자 그대여,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우리는 종종 복음서가 텍스트로 기록된 당시 '그 시대라는 콘텍스트'를 망각하곤 하지는 않습니까? 복음서는 물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대단히 유용하고,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문서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 복음은, 복음이 선포되던 시기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기록된 시기의 역사적•문화적 맥락 안에서 읽을 때, 비로소 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당대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어떤 의미로 들렸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상상하거나 당연하게 '이러저러한 의미겠지' 하고 받아들인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복음에 더욱 더 크게 감탄을 하고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서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이야기와 말씀의 보물 창고이며, 복음서는 그 중에서도 으뜸입니다! 그대여, 놀랄 준비를 하십시오.

 

 우선 복음서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 더 원활하게 나누기 위해, '복음'의 의미와 기록된 복음서의 추정 저작 연대, 그리고 당시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구독자 그대여, 다소 길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부디 마지막까지 즐겁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제가 그대에게 권면합니다. 복음서를 그대가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이로 인해 그대가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제가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제가 써서 보내는 이 편지를 너무 무겁고 어렵게 받아들이지는 않되, 그렇다고 하여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과오 또한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 오고 있는 이 성서가 기록되고 전해진 과정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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