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저번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2월의 뉴스레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지막 편지를 쓰려니 저도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래서 오늘의 편지는 한 단어도 고심해서 쓰게 돼요. 마지막이라는 건 그런 걸까요.
지난 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는 일본 북해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 가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여행을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돌아오고 난 지금은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여전히 마음의 일부는 한국에, 나머지 일부는 일본에 있는 느낌입니다.
마음이 붕 뜬 듯한 기분 아시나요? 분명 내가 겪는 일들인데 마치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서 그 일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요.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해리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해리 - 심리적, 행동적으로 개인의 정신활동에서 격리되는 것을 말해요.) 요즘 그런 느낌이 자주 들어요. 내 인생인데 마치 누군가의 인생을 지켜보듯이, 벌어지는 일들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요.
인지적, 정서적 여유가 없어서 그럴까요. 뇌가 많이 복잡한지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길래 '그렇구나. 요즘은 그런 시기구나.'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어요.
아무튼 그래서 일본 여행중에 구독자님께 들려드릴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에너지와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이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저를 다시 살게 하고 또 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들었기에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싶었어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닿은 이 이야기가 나중에 적절한 때에 새싹으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요. 어쩌면 그 누군가가 요즘의 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그 순간 운전자들은 패닉에 빠지죠. 뭐? 어떡해? 어디로 가야 하지?
순식간에 방향을 잃고 목적지와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가 됩니다.
인간의 삶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내가 꿈꾸던 것, 추구하던 것, 즉 나의 '목표'로 향하는 길에서 뭔가 하나씩 어긋날 때. 오래된 나무판자처럼 삐그덕거리며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그럴 때면 머릿속에서 '난 망했어' 하는 생각이 맴돕니다. 저는 거기서 한 술 더 떠 앞으로의 인생에 기대할 만한 건 없고, 내 인생은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고, 그러니 나는 지금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등등 완벽한 하강나선을 그리며 깊숙한 생각 속으로 파고들어갑니다.
그런데 경로를 이탈한 게 꼭 안 좋은 일일까요? 경로를 이탈한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신호 같은 게 아닐까요. '너 지금 A라는 목적지까지 가고 싶어하는구나. 근데 지금은 길을 벗어났어. 근데 그것도 괜찮아. A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꼭 이 길로 가야하는 건 아니야.'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A까지 가는 것이지 어떤 길로 가든지 상관은 없는 거잖아요. 물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 있겠지만, 그 길에서 이탈했다해서 'A로 가지 못해... 망했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편이 목표 달성에 더 좋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또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A가 중요하긴 한가? 이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실 것 같아서 풀어서 얘기해볼게요.
저는 자연을 좋아해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서, 평소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자연을 보러 가려고 하는데요. 자연을 가까이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우주 속 나는 정말 작은 존재라는 게 느껴져 잔뜩 힘을 주고 살던 게 좀 풀어지고, 또 눈과 귀가 편안하기 때문이에요. 즉, 저는 스스로의 중요성을 좀 잊고 감각을 이완하기 위해 자연을 찾는 편이에요. 만약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제가 이번주 주말에 '남산'이라는 목적지에 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까요? '낙산공원'은 어때요? 아니면 '한강'은요? '공릉동 철길'도 좋을거고 '인왕산'도 좋을거예요. 즉, 제가 바라는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 굳이 남산이라는 목적지 A에 갈 필요는 없다는 말이예요. 목적지보다 중요한 건 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가를 고민하는 것일테니까요.
시간과 가치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에너지는 무한정하지 않고 한정되어 있어 정말 꼭 필요한 데에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중요하죠. 저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이에요. 돈이나 다른 물건자본들은 구하려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은 나중에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에게 시간을 쏟는답니다.
한번은 이훤 시인의 북토크에 갔는데 북토크 시작 전 화장실 앞에서 이훤 시인을 딱 마주친거예요. 저는 너무 놀라서 '아.. 안녕하세요?' 이렇게 말했고 이훤 시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어요.
'안녕하세요. 먼 곳까지 소중한 시간 내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을 말하는 이훤 시인의 진심이 꾹꾹 담긴 듯한 말이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북토크를 보러 가려고 용산도서관으로 향했던 그 시간, 저는 충분히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죠. 좋아하는 카페에 할 일을 하러 갈 수도 있고, 집에서 영화를 보며 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갈 수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대신 그 시간을 이훤 시인의 북토크를 보러 가는데 쓰기로 했고, 이전까지는 '시간을 쓴다'는 것의 중요성을 몰랐는데 이훤 시인의 그 말을 듣고 '아!'하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렇구나. 시간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나 엄청난 것이었구나.
그럼 이제 더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어디다 쓸까? 이 질문을 쓰는데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수많은 활동들이 떠올랐어요. 동시에 지금 보문동의 한 카페에서 뉴스레터를 쓰고 있는 저의 모습도 자각이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즈음 이 뉴스레터를 열어보고 기꺼이 읽기로 선택해 시간을 들여 읽는 여러분들의 얼굴도요. 사실 그건 엄청난 일이거든요. 여러분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저의 뉴스레터를 읽는데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
시간을 어디다 쓸지 배분하는데는 우리의 가치가 중요한 기준이 될 거예요. 가치는 추상적이고 거창해보이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별 게 아니예요. 10년 뒤 어떤 사람이 되어있고 싶나요? 너무 멀어서 막막하다면 3년 뒤는요? 1년 뒤는요? 더 작게 말해볼까요. 내일은 어떤 사람이 되어있고 싶나요?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나요? 1시간 뒤는요?
이 질문에 대해 정말 나는 어떨까,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 생각해보면 그 답 안에 구독자님의 가치가 담겨 있을거예요. 음... 저는 너무 먼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아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때 저의 모습을 상상해봤는데요. 밤이 되어 하루를 정리할 때가 되어 돌아봤을때 다른 사람에게 제가 가진 것을 나누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오늘 아침에는 누워있으면서 아빠랑 동생이 할 일을 하고 있어도 최대한 모른척하면서 버텼거든요.(하하) 그래서 오늘은 좀 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배려, 나눔, 혼자만의 시간 확보 등이 오늘 저의 중요한 가치였던거죠.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나요?
작년 4월부터 11월까지, 동생이 해외에서 생활하며 힘들어할때가 있었어요. 평소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하는 동생인데 어느 날은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언니야.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데 되게 공허하고 앞으로 내가 뭘 하면서 먹고 살지도 잘 모르겠어.'
당시 동생은 진로고민도 할 겸 휴학을 하고 해외에 있는 아빠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생도 아니고 학생이 아닌 것도 아닌 애매한 신분으로 친한 사람도 없는 해외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거죠. 그때 저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어요.
'네가 가고 싶은 방향을 생각해봐. 방향만 맞으면 돼. 지금 당장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아.'
지금 진로를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그 방향을 고민해보라는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저한테도 필요한 말이었어요. 우리는 너무 많은 '목적지'를 정할 것을 강요받으며 살잖아요. '어느 대학 갈거니?', '무슨 과 갈거니?', '어떤 직업 가질거니?', '결혼은 언제쯤 할거니?' 등등 너무 많죠. 근데 사실 어떤 직업 가질지 저는 지금도 모르겠고, 단지 방향은 알고 있어요. 제가 기꺼이 시간을 쏟고 싶은 일, 앞으로도 추구하고 싶은 가치. 저는 심리학을 계속 공부해서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게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방향이 있으니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앞으로도 저의 생각과 감정을 글이라는 도구로 잘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지금 이 뉴스레터도 쓰고 있는 거구요 ㅎㅎ
목적지가 아닌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 생각만 해도 자유롭지 않나요? 어떤 방식으로 가는지는 온전히 저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요. 그만큼 두렵고 무섭고 잘 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할 때도 있겠지만, 방향을 바라보며 간다면 '틀린 길'이라는 것도 없을 거예요. 잘못된 길로 갔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스스로에 대해 한 가지를 더 배워서 돌아오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시그널을 잘 읽어보자
아까 편지를 시작하며 제가 요즘 저의 삶을 관조하듯이 바라보게 된다고 했죠. 예전같았으면 이런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게 뭐야! 나는 왜 이렇지?'하면서 또다시 끝없는 하강나선.....을 타고 저 아래로 내려갔을텐데 요즘엔 '그렇구나. 지금 그렇네.'하고 받아들이는 거는 돼요. 그냥 하나의 사실로 인정해버리고 받아들이는거죠.
그 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거는, '그래서 이 상태가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인가?'하고 질문하는 거예요.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up & down의 사이클이 있으니까 지금 down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되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은지 질문하는거죠. 이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Down의 상태면 당연히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뀌고 싶은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down의 상태여도 스스로에게 '앞으로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질문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down의 모습 그대로 쭈욱 살게 되더라고요. 필요한 질문을 하면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거죠.
그래서 저는 요즘처럼 인생이 내 인생같지 않고 down의 상태에 있다고 느낄 때 이걸 하나의 시그널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흠 그렇군! 지금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질문해야할 타이밍이군. 파블로프의 개처럼 down 시그널이 보이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질문하는 것으로 두 가지를 연합시키는거죠.
그럼 생각해볼게요. 저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냐면... 현재에 충실하게 살고 싶어요.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 먹는 음식, 읽는 책에 집중하고 싶고 그래서 인스타 같은 소셜 미디어 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이미 가진 좋은 것들을 알아보는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며 따라가려고 하기보단, 제가 가진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 잘 닦아주어 빛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또 제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나누어 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하..... 꿈이 크네요 ㅎㅎ 하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백번천번 낫다고 생각해봅니다.
지난 3주간의 뉴스레터를 읽으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품게 되셨나요? 저는 비록 짧은 스침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변화들을 보는 게 즐거워요.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더라도,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도 좋아해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도 괜찮죠. 하지만 지난번 뉴스레터에서 말했듯이, 그렇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우리는 달라지고 있을거예요.
고백하자면, 3주간 뉴스레터를 쓰는 시간은 제게도 꼭 필요했어요. 매주 저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뭘까 고민하며 뉴스레터창을 열고 한 글자씩 적어나가는 시간이 좋았어요. 분명히 이 글을 읽어줄 독자가 있을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쓰는 글은 블로그에 비밀글로 쓰는 글과는 또 다른 좋은 느낌을 가져다주더라고요. 여러분의 존재를 믿으며 써내려가는 글을 써 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또 언제 쓰게 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너무 늦지 않게 찾아올게요. 이 이야기들이 다 잊힐 때쯤에요.
-25.2.24
지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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