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메일을 보내드린 뒤로 또 한 주가 지나갔어요. 구독자님의 한 주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저는 오늘 달력을 보면서 2월이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답니다. 2월은 28일까지 있어서 그런지 다른 달보다 유난히 더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하루하루를 꼭꼭 징검다리 돌을 건너듯이 살고 싶어져요.
이번 주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진 날이 많았어요. 오랜만에 봤지만 제가 기억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대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마치 어제 본 듯 익숙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난번 뉴스레터에서 제가 1월이 힘든 달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을 최대한 안 만나려고 했다고 말씀드렸죠. 사람들을 만나면 감정조절이 안 돼서 펑펑 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2월이 되니 조금은 용기를 내어 '울어도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만나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말해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요. (다행히 휴지가 항상 가방에 있어요.) 저는 제가 만난 사람들에게 부탁했어요. '구체적이고 무조건적인 칭찬을 해줘.' 당시 저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했어요. 비판적이고 꼼꼼하고 다각도에서 분석한 그런 말들 말고 그냥 무조건적인 칭찬이요. 제가 뭔가는 잘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끈 같은거요.
사람들은 제게 저마다의 색색깔 끈을 쥐어주었어요. 그걸 꼭 쥐고 있으며 생각했어요. 이 오색빛깔 끈들은 어디서 온걸까? 나는 만들지 못하는 색의 끈을 그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했어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어쩔 수 없이 '나'라는 필터를 통과할 수 밖에 없어서, 결국 그 색색의 끈들은 저마다의 필터를 통과해 본 저의 모습이었던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옆에서 친구가 말했어요. "너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더 멋지긴 하지."
우린 같은 걸 보고 다른 걸 느끼고
'왜 사람은 같은 걸 보고도 다른 걸 느낄까?'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 말이 저한테는 항상 궁금한 질문이었어요. 물론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왜 누군가는 똑같은 걸 봐도 좋게 보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저는 주로 후자에 속했거든요. 특히 스스로에게 엄청 박해서 안 좋은 점은 크게 확대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그런데 채찍질하는 걸 또 채찍질하고... 무한 채찍질의 굴레) 좋은 점은 누구나 하는 거, 별 거 아닌거로 취급하는 걸 잘했어요. 어느날은 영화처럼 트루먼 쇼에 들어와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나만 빼고 내가 다 괜찮은 사람이라 하는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이 안 들지? 이거 몰카 아니야...?
'시옷의 세계'라는 책에 이끌린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몰라요. 김소연 시인이 쓴 이 산문집은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요.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딱 제게 필요한 만큼의 처방전 같았어요. 많이도 안 바라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조금만 비켜난 곳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은 그곳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김소연 시인은 '살아온 날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김소연 시인의 글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아요. 소중한 걸 지키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는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대신 그는 '그녀'의 입을 빌려 '나는 내 연꽃을 위해 비를 좀 맞아도 괜찮은 거라고' 말을 합니다. 연꽃이 소낙비에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연꽃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마음도 있다는 것.
누군가가 보면 '그녀'는 가망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그녀가 우산을 씌워주는 짧은 순간이 지나도 소낙비는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할 것이고 연꽃잎은 힘없이 툭툭 떨어질거예요.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녀가 연꽃 곁을 지키며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좋았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나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모순적인 생각을 할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지만, 좋은 책은 '이런 마음도 있어' 하고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줍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 마음이 두 겹, 세 겹으로 늘어나는 느낌이 들어요.
또 다른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어요. 정혜윤 작가의 '삶의 발명'이라는 산문집입니다.
너무너무너무 좋지 않나요? 정혜윤 작가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자신의 아픈 몸에 대해서 생각하는 날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검은머리물떼새 (그 보기 어렵다는 검은머리물떼새!!)를 보게 되고, 그 순간 자신만 향하던 에너지가 바깥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마법 같은 순간. 나를 잊을수록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역설적인 평온함. 이런 걸 책을 통해 배우지 않았다면 어디서 알 수 있었을까요? 종종 스스로가 못나 보이고 그렇게 미워하는 것조차 지칠 때 무작정 자연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습관은 이 글을 통해 배운 거예요. 내가 커다랗게 느껴져서 괴로울수록 바깥을 보자. 또다른 새로운 시선.
나와 타인
한번은 요가 수업에 갔는데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보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쉬워요.' 그 말이 가슴에 팍 와서 꽂혔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그들이 뭘 하든지 응원하고 지지하면서 스스로에게만 엄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운동을 꾸준히 하는 걸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를 볼 때뿐 아니라 타인을 볼 때도 그런 시선으로 보게 되겠죠. 물론 말은 안 하겠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은 운동 안 하나?' 그런 생각이 들거예요. 자신과 타인, 서로 달라 보이는 두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겉으로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상대방이 어떤 모습이든지 '그럴 수 있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라는 열려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그럴려면 먼저 제가 저를 보는 시선부터 그렇게 바꿔야 하는거예요. 지금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안 좋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뭐부터 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몇 달 전 알쓸인잡 유튜브에서 본 심채경 박사님의 말이 떠올랐어요. 너무 좋아서 노트에 적어놨는데 그 말이 번뜩 떠오른 거예요.
'나'의 경계를 희미하게, 흐릿하게 두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좋아요 수'에 집착하는 나. 어때 상관없잖아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대로 충실하게 따라가는 나. 어때? 그것도 괜찮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내가 나란 존재를 너무 촘촘하게 가둬놓으면 그 안에 무게중심을 잡는거는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서 있는거랑 똑같은 거예요. 너무 쉽게 무게중심이 흔들릴 수 있어요. 내 자신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거나 누워있다고 생각하면 무게중심을 내 안에 유지하기가 너무 쉽거든요.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거나 너무 특정한 모양으로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심채경 박사님, <알쓸인잡>
발레리나와 누워 있는 사람! 결국에는 제가 스스로에게 기준이 높고 엄격한 것도 '나는 이래야 돼.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해.'라고 정해둔 틀이 선명하기 때문이었어요.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어 너 왜 그래?'하고 스스로 탓하기 바빴는데 심채경 박사님의 말처럼 내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둔다면 제가 평소와 좀 다른 행동을 해도 '아 쪽팔려'가 아닌 '이런 모습도 있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겠죠. 이런 나도 저런 나도 될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다 내 모습이라는 걸 받아들이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요즘에는...
요즘에는 저라는 존재를 촘촘하게 가둬놓지 않기 위해서 매일 일기를 써요. 물론 너무 피곤하거나 까먹을 때면 거르기도 하지만, 거의 매일 쓰고 있어요. 꼭 밤에 쓰지는 않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이 너무 복잡하면 그때 일기장을 펼쳐서 지금 어떤 생각이 드는지 기록하기도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장을 펼칠 때도 있어요. 감정과 생각을 토해내고 나면, 매일매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는 제가 보여요. '아, 이 날은 이런 생각 때문에 우울했구나. 이 날은 또 괜찮았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변덕'으로 치부되었을 저의 여러 모습들이 일기라는 타당한 증거로 뒷받침되어 저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었어요.
신기한 게, 글로 제 생각을 쓰고 그걸 한번 더 읽으며 '이것도 나지'하고 생각하면 평소에 생활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아아아아 나 어제 왜 그랬지? 진짜 미쳤나봐.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그것도 나다.... 그것도 내 모습이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따라와요. 물론 그 뒤에 다시 이불킥 오조오억번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모습조차 저인걸요. 저는 그럴 때도 있는걸요. 그렇게 받아들이니 스스로를 대할 때도, 타인을 대할 때도 쉽게 판단하려는 마음을 내려둘 수 있는 것 같아요. '음 저 사람 지금 저렇네.' 지금 저렇지만 나중엔 아닐수도 있지. 조금 더 유연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아 좋아요.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책 구절을 중심으로 편지를 써보았어요. 쓰면서 '인용이 너무 많나? 지루해하면 어떡하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글을 쓰고 싶었던 것도 나지.'하고 또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여기까지이고, 글을 읽고 나서 받아들이는 건 구독자님의 역할이라는 걸 존중하고 남겨두려 합니다.
오늘 편지도 읽어주어 고마워요. 한 주 잘 보내고, 다음주에 또 봐요.
-2025. 2. 17
지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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