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새 따위에

2023.03.17 | 조회 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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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와 막걸리

시인 허은실 모녀의 시시소소수수 밤편지

 

뜬금없이 그의 안부가 궁금해지곤 한다.

그를 만난 건 2년 전 겨울이었다. 인근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작업을 하다가 이따금 바람을 쐬러 걷는 곳에서였다. 저물녘 기우는 빛을 받은 그의 실루엣에 나는 대번에 끌렸다.

저토록 길고 우아한 몸이라니. 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9등신은 족히 돼 보였다.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 엉덩이 쪽으로 날렵하게 빠지는 바디라인. 차림새는 또 얼마나 세련됐던지. 전체적으로 흰색 모노톤에다 재킷의 등과 팔 부분만 검은색으로 배치한 미니멀하고 모던한 컬러감. 게다가 다소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흑백의 배색을 반전시키는 분홍 스타킹이라니! 이 근방에서 만나기 힘든 감각이었다.

고독하게 서 있는 모습은 다가가 말을 걸고 싶게 부추기다가도 함부로 침해하면 안 될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도 했다. 무슨 상념에 빠져있는 걸까. 한동안 그렇게 서서 물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긴 다리를 내어 뻗으며.

하지만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까. 그가 마침내 걸음을 내디딜 때 그 멋진 첫인상은 그만 홀랑 깨지고 말았다. 처음엔 저런! 딸꾹질이 났나싶었다. 걸을 때마다 체신머리 없이 몸을 위아래로 흔드는 게 아닌가. 군계일학의 자태를 배반하는 그 모습이 경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그를 보았지만 아무래도 첫마음 같지는 않아 그냥 지나치고는 했었다. 그 웃기는 딸꾹질도 여전했지만 다시 보니 귀엽게 느껴지긴 했다.


생이

석 달 뒤, 책방무사에서 마침 생이친구(‘생이는 제주어로 ’)‘로 불리는 새 연구자 김예원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제주 성산 권역 새들에 대한 설명을 듣던 중, 그가 생각났다. 나 혼자 딸꾹새라고 이름 붙인,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 긴다리도요같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던 그에 대해 예원 님에게 물어보았다. 인상착의와 딸꾹질 같은 특징을 묘사하자 그는 대뜸 누구인지 짚어낸다.

장다리물떼새. 이름처럼 긴 다리가 특징이다. 전체 몸길이 35cm 중 다리 길이가 25cm나 되니 상대적으로 따지면 플라밍고 다음으로 롱다리인 셈.(그리고 긴다리도요는 장다리물떼새의 별칭이었어!)

그런데 여름철새라는 그가 왜 한겨울 이 습지에 있는 걸까. 

하도리 철새도래지
하도리 철새도래지

여름을 나고 떠날 때 무리에서 낙오돼 남은 녀석일 거라고 했다. 다음 여름까지 잘 버틴다면 친구들이 왔을 때 합류해 같이 떠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러자 그에게 격하게 감정이입이 됐다.

아니 대체 뭐 하다가 혼자 이 먼 곳에 남겨진 거니? 늦잠을 잤을 수도, 먹이를 구하러 너무 멀리 갔을 수도, 혼자 공상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겠지. 수학여행을 가든 엠티를 가든, 어떤 조직에서든 그런 애가 한 명씩은 있지 않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그 새. 그는 얼마나 망연했을까.

그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다시 친구들을 만났을까. 가끔 그 새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이번 여름 그곳을 다시 찾을까. 올여름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겠다. 이쪽에선 희귀 나그네새라는 장다리물떼새, 그들이 계속 찾아와 준다면.


도래

몇 주 전, 내가 오지랖 오씨라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이것저것뭐든지활동가오창현 씨가 사진을 보내왔다. 조금 흥분된 톤이었다. 내가 장다리물떼새를 만난 그곳 오조리 철새도래지에 귀한 손님이 왔다는 거다. 망원경 안에 담긴 사진 속에 멋진 노신사처럼 머리가 희고 목 아래부터는 진회색인 새 네 마리가 보였다.

겨울진객이라는 흑두루미들이었다. 그 며칠 전엔 하도리 철새도래지와 함덕리 상공에서 각각 20여 마리와 200여 마리가 관찰되기도 했단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지정 멸종위기종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 문화재청 지정 천연기념물. 흑두루미가 목격됐다니! 우리에겐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다. 제주 제2공항 건설 사업에 대한 환경부의 전략환경영향평가서 협의 결과 공개가 꼭 열흘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흘 뒤, 환경부는 조건부 동의라는 의견을 내놨다. 사실상 제2공항 건설을 추진하는 국토부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저녁 마을회관 2층이 삼춘들과 청년들로 가득 찼다. ‘제주 제2공항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현 상황을 설명하고, 저지를 위한 지혜와 힘을 모으기 위한 자리. 각종 난개발과 관광객 급증으로 이미 포화상태인 쓰레기와 오폐수 문제, 숨골과 지하수, 소음공해 등 제2공항을 막아내야 할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조류충돌 영향과 서식지 보호였다.

공항 예정지인 제주 동쪽 해안은 제주 최대 철새도래지이다. 예정지 중심에서 반경 8Km 이내에 오조리 철새도래지와 종달리 철새도래지가 있다. 관찰된 종수는 41, 총 개체수 11,678마리, 국내 법정보호종만 9. 반경 13Km 이내에 하도리 철새도래지와 성산-남원 철새도래지가 있다. 국토부 전략환경영향평가 결과 관측된 새만 140여 종 56천여 마리. 공항 예정지에서 5Km 떨어진 두산봉에선 멸종위기종 1급인 매의 서식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깟?

당신은 묻는다.

그래 그깟 새가 뭐라고, 기껏 새 때문에 국책사업이 중단돼야 하냐고.

그래서, ‘새들의 국제공항을 철거한 자리에 인간만을 위한 공항을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 새가 사라진다면. 예원 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제주와도 비슷한 괌의 사례였다.

1940년대 우연히 미국 군용 화물을 통해 갈색나무뱀이 들어온다. 30년 후, 괌은 토종새들이 거의 절멸하고 기이한 거미의 천국이 되었다고 한다. 새를 잡아먹는 이 외래종 뱀이 들어온 뒤 토종새 12종 가운데 10종이 멸종한 것이다.(2종은 뱀 덫으로 보호하는 좁은 지역에서 근근이 살아남았다고.) 새들이 절멸되다시피 하자 거미들이 인근 섬보다 40배나 폭증했다. 이 사례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생태 재앙의 하나로 보고되었다.

먹이사슬의 작은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지거나 비정상적으로 과포화되면 생태계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아무런 피해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묻는다.

그래 그깟 새가 뭐라고, 새 따위에 기대를 거냐고. 순진하고 딱하다고.

하지만 새들이야말로 어쩌면 전략적인 희망이다. 버드 스트라이크, 즉 항공기와 조류 충돌로 인한 안전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환경연구원조차 제2공항이 들어설 경우의 조류 충돌은 기존 제주공항에 비해 최대 8.3배나 높은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그런데도 환경부는!)

속도만으로도 하늘의 제왕인 매와 비행기의 충돌 가능성, 그리고 흑두루미들의 이동경로가 항공기의 비행경로와 겹칠 가능성마저 보태진 상황인 것이다. 결국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 있는 건 그 공항을 짓자고 한, 혹은 건설을 묵인한 누군가일 수 있다.

(이 버드스트라이크의 위험과 심각성은 이미 공영방송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다루었다. 꼭 보시길 권한다.)


“우리 마을이 사라진 뒤에 눈물 흘리지 말고예, 할 수 있을 때 지켜냅시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당부하는 창현 씨의 목소리가 떨린다. 이 아름다운 마을이 사라지고, 내 아이의 첫 학교가 사라질 미래를 떠올리니 나도 그만 울컥해진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결국 강행되지 않겠냐고, 나부터 패배주의에 빠지지 말자. 농사나 짓는 이런 사람들이 새들 사진 찍고 맹꽁이 소리 녹음해서 되겠냐고,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자. 새들이 울지 않는 침묵의 봄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 레이철 카슨의 우려가 이 아름다운 섬에서 현실이 되지 않게.

절대 냉소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는 냉소주의야말로 적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까짓 새 따위라고 냉소하고 절망하지 말기로 한다. 어쩌면 ‘그깟따위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러니 쉽게 눈감지 말아야겠다. 철새들처럼 한쪽 눈은,

 

철새들은 한쪽 눈을 뜨고 잔대 감지 않는 거겠지 - 「Midnight in Seoul」 (『나는 잠깐 설웁다』, 허은실, 문학동네, 2017)

잘 지내니? 오조 철새도래지에서 만난 장다리물떼새
잘 지내니? 오조 철새도래지에서 만난 장다리물떼새

덧)

시간이 되신다면, 2공항 추진으로 훼손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 제주의 또다른 가치에 대해 쓴 글 숨골과 폭낭, 제주라는 숨과 쉼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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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관

    0
    about 1 year 전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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