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울어!!? 엄마 진짜 갱년기야?”
무슨 영화를 보다가였더라, 눈에 물이 고였나 보다. 고걸 안 놓치고 오늘도 팩폭하는 젤리킴 되시겠다.
“아니야, 눈에 바람이 들어가서 그래.”
그래 봤자다. 괜히 눈이 시린 것도 결국 노화를 증거하는 일밖에 더 되겠나.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쩍 책이나 휴대폰 든 손을 멀리 뻗게 된다. 버티다가 결국 안경점을 찾았다.
“나이가 들면 수정체랑 수정체를 잡고 있는 미세한 근육도 탄력이 떨어지거든요.”
사려 깊기도 하시지. 미리 찾아본 리뷰대로 글라스스토리 사장님은 역시 친절하셔서 ‘노안’과 ‘돋보기’라는 단어를 피하시면서도 고객님이 생애 첫 돋보기안경을 주저없이 구매하도록 이끄신다. 하필 생일이어서 돋보기는 내가 나에게 사주는 생일선물이 된 셈.
‘20살일 때는 괜찮겠지만, 나처럼 47세가 되면, 금성이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해도, 안경을 써야만 겨우 볼 수가 있다.’
W.M.새커리(Thackeray)라는 영국 소설가가 한 말이라는데, 만 47세가 되었으니 딱 그 나이다. 안경을 쓰고 보니 금성이 바다에서 솟아오른 건 모르겠고 흐릿한 글자들이 과연 초저녁 금성처럼 또렷하긴 하네.
그나저나, 갱년기냐고 놀리는 너는? 너도 벌써 사춘기냐? 엄마가 말이야, 친구들이랑 뒤풀이 좀 하겠다는데 말이야, 한 시간만 같이 있어 달라는데 말이야, 그걸 못 기다려주고 홱, 일어나서 팩, 가버리냐? 응?
“그럼 엄마도 너 00교육원 가도 안 기다려주고 학습관도 안 데려다준다?!!”
유치하게 받아친 걸 보면 진짜 그건가...
며칠 전엔 책을 보던 젤리가 이런 말을 던진다.
“엄마, 열두 살이 중요한가 봐.”
“왜?”
“책에 자주 나와.”
“그런가. 그러고 보니 영화에도 12세 관람가가 따로 있네.”
“고학년도 5학년부터잖아.”
“고학년은 4학년부터지.”
“아니지, 4학년은 중학년이지!”
(으응? 그런 말이 있었나)
인터넷서점 검색창에 ‘열두 살’을 키워드로 넣어본다. 무려 237건이나 뜬다. 정말 열두 살이 중요한가 봐. 대체 왜? 내친김에 책들을 찾아본다.
음... 그렇다면 뇌과학적으로는 어떨까. 찾은 김에 다른 책도 꺼내 본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12살이 되면 뇌는 더 이상 새로운 신경세포를 만들지 않고, 대신 덜 사용돼 불필요한 시냅스들을 제거해 나간다. 이 가지치기를 통해 ‘나’라는 고유한 인격체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성경도 꺼내 본다.(돋보기가 정녕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열두 살에 이미 지적으로 성숙해서 사흘 동안이나 혼자 선생들과 맞짱토론을 했다는 얘기다. 이에 질쏘냐. 부처핸즈업!
“열두 살에 이르렀을 때는 여러 가지 기능을 두루 다 섭렵해 이미 통달”(<불본행집경>)하시니 숫도다나 왕의 태자로 정식 책봉되는도다. 게다가 이 해 농경제 파종식에서 싯타르타는 신분의 고하와 이 세계의 먹이사슬을 목격하고 생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다는데, 겨우 열.두.살.에! 뭐 그래서 예수님이고 그래서 부처님이겠지요. 성인(成人)이 되는 과정에서든 성인(聖人)이 되는 길에서든 열두 살이 중요한 계단인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예수, 붓다는 (비)인간적으로 너무 나간 것 같네.
열두 살을 생각하니 <우리들>이나 <문라이즈 킹덤>, <레옹>의 마틸다 같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줄줄이 떠오르지만, 우리가 제일 아끼는 열두 살은 역시 진희가 아닐까.
단순히 주인공이 열두 살이란 이유로, 게다가 100쇄본이란 특별함 때문에 젤리의 열두 살 생일선물로 <새의 선물>(은희경, 문학동네)을 샀다. 샀는데, 서문을 펼쳤다가 어머니는 그냥 다른 책들 사이에 조용히 그것을 끼워넣고 말았습니다. 아니 첫 장부터 섹스 이야기가 나오는 걸 마흔여덟 살 먹은 내가 어떻게 기억하겠냐고.
제주어로 요망지기 짝이 없는 진희는 도도시크하게 말한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라면, 적어도 뇌과학이나 위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인간 뇌의 무게는 이 무렵 최대치로 성장하고, 위의 크기 역시 어른의 그것만큼 다 자라 실로 위대(胃大)해지니까. 당신 집의 열두 살이 라면을 세 개씩 끓여먹고 거기다 밥을 말아 먹는다 해도 놀라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나의 열두 살은 어땠더라. 통 기억이 나질 않아 앨범을 꺼내 본다. 사진 속의 열두 살은 지금의 젤리처럼 조금 마른 편이고 아직 통통한 볼살은 촌아이답게 그을렸다. 그다지 즐겁거나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데 햇빛 때문인지 오히려 찡그린 편이다. 얼굴에 흐릿하게 머문 미소도 금방 달아날 태세로 어정쩡하다. 사진들 어디서도 환하게는 웃고 있지 않다. 그 열두 살은 무슨 꿈을 꾸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젊디젊은 엄마는 거미처럼 말랐다. 동생이 셋 있고,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철이 좀 일찍 들었을까. 그건 모르겠고, 철쭉은 철없이 환하다.
젤리야, 인사해. 너랑 조금 닮은 이 아이는 자라서 지금 네 옆에 있는 사람이 되었어. 어쩌다 엄마라는 게 돼서 늘 허둥지둥 안절부절하고, 흰머리가 늘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그래, 네 말대로 또! 울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아줌마야. 어때. 웃기지?
(이거 봐, 이거 봐. 나 또 감상적이 되려는 거야? 역시 갱년기 맞네. 정신 차리라고) 김일영 시인(젤리 부친)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래서인가 내 열두 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젤리를 보며 생각한다. 열두 살의 나와 열두 살이란 나이에 대해.
그것은 유년이라는 어떤 무구함의 막바지. 저녁해가 먼 산 뒤로 빨려들어 가면서 그 마지막 빛을 이쪽으로 던질 때처럼. 물방울이 마르고, 작아지는 붉은 점이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생의 첫 번째 시절이 끝나려 하고 있다. 그 마지막 순수함이 아슬한 안타까움으로 빛을 내고 있는 시기. 그러나 청소년이라 부르기엔 아직 애매한 나이.
인생이 분홍빛만은 아니라는 것과 세상이 따뜻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돌이키거나 무를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나이.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며, 눈치로 아주아주 많은 것을 감지하는 나이. 그러니까, 알아버리는 나이. 그것을 더는 부모에게 내비치거나 나누지 않고 자기만의 기억 서랍, 감정 서랍에 넣어두기 시작하는 나이. 순진하면서도 영악하고 명랑과 순수를 연기할 수 있는 나이.
기쁨과 즐거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분노와 실망 등 기본적인 감정들을 한 번씩은 맛본 나이. 그러나 깊은 실의와 회한, 서글픔과 서러움, 상념과 번민, 비애과 고독, 갈망과 절망이 아직 다녀가지 않은 얼굴. 그리고 그것. 사랑. 아직은 사랑에 데지 않은 얼굴로 이제 너는 걸어간다. 그것을 향해. 두려움 없이 뛰어들길 바라. 그 모든 인간의 감정들 속으로. 그리하여 많은 것을 겪고 또 많은 것을 잊은 얼굴이 되겠지. 오늘의 나처럼 다시 너를, 너였던 너와 너의 너를 만나게 되겠지.
‘인체가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매정하게 알려주지만, 따져보면 갱년기의 갱은 ‘다시 갱更’자다. 이제부터(는/라도) 삶을 다시 살라고. 지나온 길을 한 번쯤 되짚어 바래어가는 사진첩 속의 눈빛을 비로소 헤아려보기 좋을 시기.
앨범 속의 어린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한 세대쯤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와 눈 맞추고 가만히 안아줄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어른이 된 자기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표정과 눈빛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눈으로 새로이 보라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금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다시 보라고, 그러라고 노안도 오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 젤리야, 응, 엄마 진짜 갱년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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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바람
'가까운 사이일수록 멀찌기 떨어져 보라'는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진 신체의 변화를 겪고 계시군요. 어쩌면 '꿈보다 해몽'일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내맘, 내몸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날마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되뇌이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거죠.
젤리와 막걸리
안경 써보 며 ‘막걸리야, 생일 축하해. 잘 익어가고 있구나”…. 어쩌구 하는 문장을 썼다가 퇴고하며 지웠었는데 솔바람 님 댓글이 뙇! #_# 맞아요 받아들이면 오히려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첫 댓글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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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과거의 열두살 현재의 열두살 현재 열두살 젤리가 빨리 성숙하네요 ♡❤🧡💛
젤리와 막걸리
그러게요.ㅠㅠ너무 빨라 속상하지만 마음도 자라겠죠… 좋은 이웃들 속에서 건강한 마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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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사람
젤리가 넘 이뻐요^^
젤리와 막걸리
그렇다면 그거슨… 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3=3=3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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