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지막 밤편지✉

2023.10.27 | 조회 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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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와 막걸리

시인 허은실 모녀의 시시소소수수 밤편지

아... 벼룩...우웨엑!

 

사람들은 자신의 한심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까.

지난 주말은 내 한심함의 질량과 부피와 면적과 무게에 눌려 침대 속에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숙취 때문이었지만.

토요일엔 젤리의 음악 수업 때문에 서귀포에 가야 해서 평일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 여름부터 절주를 하고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불금에는 더욱 술을 자제하던 터였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은, 남편이 제주에 내려온 날인 데다 나는 다음날 마을 벼룩시장에 참여하기로 해서 젤리 데려다주는 일을 남편에게 맡겨놓은 상황.

허나, 남편 찬스를 믿고 너무 마음이 풀어졌던 걸까. 아점 이후 제대로 먹지 않은 공복 상태에서 술부터 들이부어서였을까. 막걸리도 쌀로 만든 거니까 밥을 따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허술논리를 이제 폐기해야 할 몸(연세)이 된 걸까. 아니면 남편 말대로 너무 오래 절주를 해서 몸이 초기화된 것일까. 아마도 이 모두가 동시적으로 작용한 탓이겠지.

아침 알람소리에 남편이 일어나는 기척을 듣고 다시 숙면, 아니 숙취 상태로 돌아가 11시쯤 정신이 들었다. 머리가 깨진다. 머리의 탁도가, 흔들지 않은 막걸리 병의 맨 아래 쌓인 앙금만큼이나 진하다. 만나서 같이 가기로 한 지인에게, 먼저 가 계시라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숙취 모드. 1시간여만에 다시 깬다. ... 벼룩시장 가야 하는데...

뭐라도 먹고 정신을 차리자. 그렇지만 뭐가 들어갈 속이 아니다. 갈증이 일어 ABC주스 두 잔을 마신다. 머리는 이제 뚜껑을 따기 전 잘 흔든 막걸리의 탁도 정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30분 정도 더 쉰다. ... 벼룩시장 가야 하는데...

그래 꿀물을 마시자. 꿀을 듬뿍 넣고 벌컥벌컥 마신다. 꿀물도 마셨으니 이제 움직여보자. 어 그런데 움직여선 안 될 것 같다. 내가 움직이자 위도 움직이는지 속이 심상치 않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거실로 나온다. 화장실과의 직선거리가 짧은 식탁 의자에 앉는다. 아니나 다를까. 달려가 변기를 껴안는다. 불그죽죽한 ABC가 펌프질 당해 변기로 옮겨진다. 노리끼리한 H(꿀)도 섞여 있다. 아... 벼룩... 우웨액!


왕년의 매컬리 허
왕년의 매컬리 허

탁한 뇌, 깨어지는 머리와 찢어지는 속, 위산에 긁혀 쓰라린 식도까지 부여잡고 다시 침대로 기어든다. 토하기까지 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 벼룩시장 가야 하는데...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두통과 위통이 아니다. 함께 참여하자고 수산 자매들을 끌여들여 놓고 혼자 빠진 상황에 대한 미안함. 그 이유가 다른 게 아닌 술 때문이라는 것으로 인한 부끄러움. 다음날 일정이 있음에도 무절제하게 마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 으휴 인간아, 한심하다 한심해!

그런데 무절제하게라고 하긴 좀 억울한 것이 어제 마신 건 막걸리 두 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왕년의 주력으로 막걸리 두 병은 식간주 정도일 뿐이었는데 단 두 병에 이 따위로 무너지다니. 이렇게 생각하니 저질화한 체력에 대한 좌절까지 더해져 나는 이불을 더 당겨 뒤집어쓴다. 그러노라니 어언 3시가 되어가고. 5시까지 예정인 벼룩시장에 가는 건 이제 무의미하다. 결국

저는 어제 마신 막걸리에 체해... 미안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오늘 포기하고 근신...’

주최측과 지인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니, 나의 한심함이 대외적으로도 문자화, 박제화한 듯해서 더욱 괴롭다. 웅크리고 누워 나를 욕하며 내적 주먹질을 하고 있는데 젤리가 귀가해 들어온다.

“엄마 벼룩시장 안 갔네?” “응..., 못 갔어.” “왜, 어제 운 것 때문에 눈 부어 챙피해서?” (으응... 이건 뭔소리... 울었다니...누가... 내가?)

대답을 애매하게 흐리고 있는데 젤리가 배우 모드로 전환,

“엉엉... 젤리야... 팔레스타인에... 죽은 아이들이 있어...”

우는 흉내를 내며 어젯밤의 나를 재연한다.

(그랬다고? 내가?)

나는 더욱 절망한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를... 않아...

이기 머선 일이고?’

옆에 섰던 남편을 향해 묻는 눈빛을 보내보지만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을 따름. 평소라면 얼씨구나, 젤리랑 합세해 놀려댈 양반인데 함구로써 나를 방어할 정도면 대체 나는 얼마나 추태를 보인 건가.

기억이 나고 안 나고를 떠나서 아...! 딸 앞에서 이 무슨 비교육적 주접이란 말인가. 술 취해 우는 거야말로 진상 중의 진상이라 여기는 내가 말이다. 어젯밤의 진상을 밝히고 싶지만 일단은 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돌려버린다.

“공드리 가 봐. 벼룩시장에서 맘에 드는 거 있음 아빠한테 사달라고 해.” “피곤해. 그냥 쉴래.”

그러니까 주정뱅이 엄마 때문에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피곤하다 그 말씀이시다.

끄응...’, 쓰라린 신음이 비어져 나온다.

대체 어느 타이밍부터 필름이 끊긴 건가. 이렇게 완전한 블랙아웃이라니. 아 인간아, 화상아, 진상아...

저녁 무렵 미역국 국물 조금 마시고, 양치질만 겨우 하고 다시 누워 일요일 낮까지 내처 침대 속에 있었다. 이틀 동안 세수도 않고 허리가 아프도록. 그 진상을 껴안고 그 화상을 견디며. 못 견디게 미워하며. 스스로를 매컬리 허라고 부른 나를 부끄러워하며. 이제는 진짜, 끊자.


엄마의 주사 
엄마의 주사 

마이 묵었다 아이가

6년이다. ‘제주막걸리로만 따져도. 6년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마셨으니, 충분하다. 게다가 <젤리와 막걸리>도 이번이 마지막이잖아. 끊기에도 얼마나 시의적절한 나이쓰 타이밍이냐. 이제 됐다. 결심하고 다짐한다.

다음날 분리수거를 하면서 보니 막걸리는 두 병이 아니라 세 병이다. 먼저 마신 한 병을 바로 플라스틱 수거 봉투에 넣었던 것이다. 세상에나. 20-30병도 아니고, 2-3병 갖고 몇 병을 마셨는지도 모를 정도로 필름이 끊기다니. 진짜 심각하다.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게 맞잖아. 그런데 이 와중에

그러면 그렇지, 두 병 갖고 그렇게 취할 리가 있어?’

내심 안도하는 나라니.

역시 내 체질엔 독주가 맞다니까. 이제 막걸리 말고 독주만 조금씩 마셔야겠어!

바로 갈아타 버리는 나라니.

그럼 이제 젤리와 막걸리대신 젤리와 위스키로 타이틀을 바꿀까? 아님, 젤리와 한라산? 젤리와 고량주? 젤리와 보드카? 젤리와 꼬냑? (그만해!!)



고마 해라, 니도 마이 묵었다 

“세상에! 이거 뭐야?”

젤리 방에 들어갔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병이 쓰러져 있길래 세워 놓으려고 들었더니, 빈 병인 거다. 젤리가 주눅 든 표정 연기를 하며 나를 바라본다.

“먹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래서! 한 병을 다 먹어버렸단 말야?” “응... 미안.... ” “아이고 미쳤구나, 미쳤어.”

그 에미에 그 딸인 거냐.

젤리 한 병을 하루에 다 먹어버린 거다. 언젠가 J이모가 보내준 젤리 형태의 영양제가 먹고 싶다길래,

이왕이면 편의점 젤리보다야 낫지. 게다가 성장기 어린이에게 좋은 오메가 3, DHA가 함유됐잖아. 오오, 합성첨가물도 전혀 쓰지 않았네

하면서 냉큼 주문했던 터였다. 병을 건네면서 하루에 3-4알씩만 먹으라고 언질했건만, 완샷!(네네... 그 에미에 그 딸...) 60개를 다 잡솨버린 젤리 되시겠다. (허긴 젤리 앞에서 막걸리 추태를 보인 자로서 이런 말할 자격은 없다만...) 입을 물고기처럼 쫑긋, 눈을 깜빡거리며 애교 작전을 펴는 젤리를 향해 레이저를 쏜다.

“이제 당분간 젤리 안 사줘!” “알았어...”

그래, 너도 충분히 먹었다.

젤리는 젤리를, 막걸리는 막걸리를.

그러니 이제 작별 인사를 하자.

젤리는 젤리에게, 막걸리는 막걸리에게.

안녕! 덕분에 즐거웠어.


매달 젤리와 막걸리를 사준 구독자들도 안녕!

덕분에 젤리와 막걸리는 젤리와 막걸리를 원없이 먹었어요.

지난 1, 구독을 유지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동안 따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점점 활자를 읽는 일이 어려워지는 시대에 글을 읽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기에 송고 버튼을 누를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1년간 한 번도 펑크 내지 않고 그림일기 마감을 지켜준, 마지막화의 삽화를 특별히 패드로 그려준 젤리 작가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목요일 밤 열두 시의 허데렐라’, ‘매컬리 허는 만날 수 없지만 간간이 쓰게 되는 글이나,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비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낼게요.

그때까지 건강히 안녕하기를!

어느 날 우연히 우편함에서, 친구가 보내 온 편지를 발견한 여러분 얼굴을 상상해보는 밤.

 

from. Jelly & Mccully

 



벌써 1년! 그동안 감사했어요 (❁´◡`❁)
벌써 1년! 그동안 감사했어요 (❁´◡`❁)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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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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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산사람

    1
    6 months 전

    연인은 아니구 친구라 하기엔 넘친한 걸이 보내주는 위문 편지처럼 딱히 기다린 것 같지는 않은데 봉투를 뜯을때 설레임이 ..., 소소한 이야기들이라 더 정감이 있던건지는 모르나 감시라도 머리통에 잡다함을 잊게 해주는 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ㄴ 답글 (1)
  • SMW

    1
    6 months 전

    ㅋㅋㅋㅋㅋㅋㅋ마지막까지 컨셉에 너무 충실하신거 아닙니까!!! 금주는 못하실거같은 느낌이 확드네요. 잘지내요 젤리막걸리님

    ㄴ 답글 (3)
  • 끼룩끼룩

    1
    6 months 전

    친구가 보내 온 편지라는 마무리 인사에 뭉클합니당 ㅎㅎ 1년(전 구독한 지 10개월이네용ㅎㅎ)이라니 벌써..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글 하나하나 소중하게 읽었습니다. 매컬리 작가님도 젤리 작가님도 항상 건강하시길 멀리서 바랄게요!

    ㄴ 답글 (1)
  • 쑥대머리

    1
    6 months 전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매컬리허 작가님 젤리 나린 작가님 두분덕에 품격있는 1년 보냈어요 존경합니다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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