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개와 꽃과 똥

발리 통신

2024.01.31 | 조회 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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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와 막걸리

시인 허은실 모녀의 시시소소수수 밤편지

“그거 가네샤한테 바치는 거니?” “응.” “가네샤도 커피를 좋아하나 보네.”

우벳이 작은 커피잔 두 개를 제단에 올립니다. 힌두의 대표적인 코끼리신 가네샤를 위한 모닝 커피인가 봅니다.

잠시 후 율리아나가 제물 그릇들이 든 쟁반을 왼손에 받쳐들고 옵니다. 율리아나는 지금 머물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입니다. 우벳은 직원이고요. , 저는 지금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습니다. 젤리와 함께 한달살이를 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진학 사이,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닌 일종의 인생 간절기를 맞은 젤리와 함께 조금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서울은 춥고 제주엔 눈이 많이 왔었다는데, 저는 지금 열대 특유의 달큰하고 습한 공기 속으로 매일 새롭게 스며드는 꽃과 향의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차낭 사리를 올리는 율리아나
차낭 사리를 올리는 율리아나

율리아나가 쟁반에 있던 차낭 사리(canang sari) 하나를 가네샤 앞에 내려놓습니다. 두빠(dupa,)를 피우고, 성수를 뿌립니다. 꽃잎 공양을 하는 율리아나는 노란색 띠인 슬렌당(selendang)을 둘렀습니다.

차낭은 바나나잎이나 코코넛잎으로 만든 작은 제물그릇입니다. 그 안에 꽃잎모듬이나 밥, 과일, 과자, 때론 담배나 커피 같은 것을 담아 신에게 바칩니다. 율리아나에게 이 의식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므반뜬(Mebanten)이라 일러 주네요. 힌두교도가 90% 이상인 발리에서 이런 므반뜬은 매일 두세 번씩 행해집니다. 밥을 먹듯이. 그야말로 일상다반사, 일상므반뜬.

차낭 안에는 봉숭아와 메리골드 꽃잎이 있습니다. 꽃 중앙에는 판단(Pandan)’이라고 하는 허브 종류의 잎을 올리는데 모든 꽃은 제각각 신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이런 꽃 외에 발리의 대표적인 꽃인 캄보자와 천일홍도 많이 올리는 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똑같은 꽃들이 핀다고, 나는 봉숭아물이 겨우 남아 있는 손톱을 보여주었습니다


차낭(canang) 
차낭(canang) 

차낭이란 말을 들으면서는 제주의 차롱이 떠올랐습니다. 제주의 납작한 대나무 바구니를 차롱이라고 하는데요, 많은 것이 제주와 비슷합니다. 지금 제주엔 붉은 동백이 송이째 올레 위에 떨어져 있겠지요. 여기엔 캄보자가 동백처럼 툭,, 떨어집니다.

마을마다 신당이 있는 제주처럼 발리에도 도처에 제단이 있습니다. 마을 하나당 3개의 수호신(창조신·유지신·파괴신)을 모신 사원이 있고, 집집마다 조상을 모시는 사원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집이 자신들만의 성소를 여럿 갖고 있고, 아무리 작은 골목과 다리에라도 반드시 차낭을 놓습니다. 제주에 성주신, 문전신, 측간신, 지붕신, 우물신 등 장소마다 모시는 신이 있는 것처럼요. (신들의 섬에서 살다 온 곳이 또다른 신들의 섬인 셈이네요.)

제주 역시 1만 8천 신들의 섬이라 불리지만 이곳 발리에 비하면 아우 격입니다. 제주에서 신들이 점점 처소를 잃고 있는 신세라면 발리에선 아직 모든 곳에서 살아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보다 신이 더 많은 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을 위한 장소와 꽃들과 의식이 일상 속에 시시로 처처로 있습니다.


캄보자 꽃과 천일홍이 놓인 아침 제단
캄보자 꽃과 천일홍이 놓인 아침 제단

발리에는 신이 많아 꽃이 많고, 발리에는 또 개가 많아 똥도 많습니다.

왜 신은 유독 덥고 시끄럽고 더러운 곳에 많은 걸까요.(물론 이 형용사들의 판단 기준이 실은 몹시 주관적이고 오만한 것임을 인정하고서요) 오래 전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질문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수로 위의 차낭. 차낭은 길 위의 존재들에게 밥이 되기도 한다
수로 위의 차낭. 차낭은 길 위의 존재들에게 밥이 되기도 한다

율리아나에게 제주와 발리의 비슷한 점을 말해줬더니,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제주 로케이션이 많아 자신도 제주라는 이름이 익숙하다고 하는군요. 그러면서 다음에 발리에 온다면 녜삐(Nyepi)와 갈룽안(Galungan) 시즌에 맞춰서 오라고 권합니다.

특히 힌두 최대의 명절인 녜삐는 자바 힌두력으로 새해 첫날인데요.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지요. , 소음, 외출, 취사가 금지돼 침묵의 날로도 불리는 이 날은 항공기 운항도 멈추고 공항도 폐쇄된다고 하네요. 세속의 모든 소리와 빛이 사라진 밤, 그래서 가장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다는 율리아나의 낭만적인 설명 때문에 저는 벌써 다음 번 발리를 생각하고 있군요. 갈룽안은 2월 말이고, 녜삐는 3월이니 이건 아무래도 버킷리스트로 남겨야겠습니다.


우붓에서 만난 꽃 따던 소나이. (안물어보고사진올려서미안해요)
우붓에서 만난 꽃 따던 소나이. (안물어보고사진올려서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1월의 마지막날. 곧 설날이 다가오네요. “너네 나라에선 생일이 두 번이라면서?”라고 물었던 율리아나의 말처럼 우리에게 음력 설날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미처 못 건넨 새해 인사를 설날 앞에 챙길 수 있으니까요. 저도 덕분에 새해 인사를 겸한 오랜만의 안부를 이렇게 남겨봅니다.

설날엔 저도 차낭 사리를 사서 가네샤 앞에 놓아야겠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에게도 새해에는 다행한 일들이 많기를 기도할게요. 불행이 닥쳐도 현명하게 지나갈 수 있는 지혜를 기원할게요. 가네샤는 지혜와 행운의 신이라고 하니까요!


 

여름은 오래 이곳에 남아 
여름은 오래 이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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