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한권, 소개 편지.

2023.08.31 | 조회 1.3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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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정지우 작가가 매달 '한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구독자님,

열세 번째 한 권, 소개 편지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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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로 고른 책은,

장 그르니에의 <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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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가 살면서 가장 여러번 다시 읽은 책을 꼽으라면, 장 그르니에의 <섬>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대여섯번은 읽었는데, 로스쿨 시절에 읽었던 암기장 정도를 제외하면 그 정도로 많이 읽은 책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번에 장 그르니에 <섬>을 추천하게 된 데에는 그런 개인적인 애정도 있지만, 지난 번 추천했던 알베르 카뮈의 <결혼>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알베르 카뮈는 장 그르니의 <섬>에 서문을 썼는데, 인류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서문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근사한 글입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 속에 담긴 구절보다 이 서문이 더 유명할 정도지요.

그 중 일부를 담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었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준 뒤에는 다 비워내는 신들이었다. 오직 그들과 더불어 있을 경우에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어느 날 그 무례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과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장 그르니에, <섬>, 김화영 번역, 민음사. 이하 동일.)

카뮈는 장 그르니에의 제자로서 그르니에로부터 세계에 대한 사랑과 관조, 실존을 배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를 읽으며 비슷한 감성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두 작가의 에세이를 나란히 놓고, 무척 좋아했죠. 물론, 제가 쓴 책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도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

<섬>은 말하자면, 일종의 철학 에세이입니다.

그래서 결코 쉬운 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많은 쉽고 친절한 에세이들이 비하면, 때로는 문장 하나하나가 벽으로 느껴질 만큼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래서인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이해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좋았던 에세이가 두번째 읽으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세번째 읽으니 전혀 다르게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아마 여러 고전의 매력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깊게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매력적이죠.

청춘 시절, 저는 특히 이 책에서 너무나 많은 구절에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입니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다들 그러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청춘 시절 깊은 불안을 느끼며 해가 저무는 시간, 잠드는 시간을 두려워하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텅 빈 방안의 창백한 태양에서 느껴지던 불안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세계로부터 오는 불안을 껴안고 홀로 살던 시절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시절에 그저 다른 자극적인 콘텐츠로 도피하는 대신, 이런 문학 작품들이 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헤르만 헤세, 콜린 윌슨, 샐린저, 도스토예프스키, 어슐러 르귄 등이 불현듯 떠오르는군요.

어느덧 그런 불안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종종 혼자 있을 때면 그 시절의 마음이랄 게 생각나곤 합니다.

마치 세상의 끝에 혼자 덩그러니 방 안에 남아있던 기분, 거리를 거니는 모든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나 혼자 유령이 된 채 이국의 땅을 거닐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말이죠.

그럴 땐 장 그르니에 <섬> 속의 여러 구절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런 구절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어소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무도 나에 대해 모르는 비밀스러운 삶, 거기에서 느껴질 자유에 대해 생각하곤 하죠. 박정현씨가 부른 <도착>이라는 노래도 생각나네요.

이런 식으로 저의 어떤 시절은 온갖 노래, 문학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흔적들은 아직도 제게 남아 이어지고 있기도 하고요.

 

*

이 책에는 여러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고전에 기대는 시간>에서 충분히 소회를 적어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의 구절만 더 소개해볼까 합니다. 너무 많은 분량을 소개해드리는 건 독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분들께서 책을 직접 집어드는 안내자의 역할 정도에서 이 편지가 그치는 게 제가 보내드리는 편지의 목적이기도 하고요.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 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어떤 여행의 끝에서, 눈앞에 펼쳐진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우리는 언젠가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거나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풍경을 결국 우리가 감내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는 저 모든 삶을 살아볼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죠.

프랑스 프로방스에서의 삶이라든지, 아일랜드 숲에서의 삶이라든지, 동남아 어느 섬에서의 삶이라든지, 오래된 대학교에서 연구하는 삶이라든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삶들이 있고, 청춘은 그 모든 삶을 온 마음을 담아 동경합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 그 중 어느 것도 나의 삶이 아니며 그저 내가 바라볼 수밖에 없고, 여행지에서 떠나듯 잡을 수 없는 삶이라는 걸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그 눈물 이후에는, 우리의 삶을 담담히 인정하고 긍정하는 단계가 와야할지도 모릅니다.

삶에는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기 마련이죠.

 

*

이번 책 소개 편지는 여기에서 마칠까 합니다.

사실, 매번 책 소개 편지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구독자분들께서 의미있게 편지를 받아보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뉴스레터의 특성상 피드백이 적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혹시라도 저의 책 추천이 도움이 되신다면, 댓글이나 SNS 태그 등 어떤 형태로든 피드백을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책 추천이야 계속 이어가고자 하나, 또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는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

그럼, 다가오는 가을, 좋은 독서의 시간 많이 누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책 정보 바로가기

장 그르니에, <섬> 표지
장 그르니에, <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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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주영

    0
    about 1 year 전

    9월 1일, 가을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아침에 가만히 앉아 지우님의 책 추천을 읽어봅니다. 언급하신 섬의 구절에서 '불안'을 먼저 글로 남겨준 장과 불안을 껴안고 살며 이 구절에서 위로받았던 그 시절 지우님에게 새삼 위로받아요. 오히려 청년 시절 미래를 낙관했던 저는, 책임질 게 많아진 지금, 종종 저 막연한 불안을 이제서야 종종 느끼곤 합니다. 그럴 땐 가까이 자고 있는 아이를 뒤에서 껴안고 숨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요. 여러번 언급하신 책이라 기억하고 있지만 아직이네요. 이 계절이 가기 전에 꼭 읽어봐야겠어요. 오늘도 좋은 추천글 감사합니다. (두번째 인용하신 문장에는 오타가 있어요 '무엇보다도')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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