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유럽을 여행하던 중, 한 일본인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무척 호쾌한 사람이어서, 그저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나는 좋아하던 일본 문화에 대해 그에게 하염없이 늘어놓았던 것 같다. 좋아하던 만화나 음악, 문학 또 예전에 간 적 있던 일본 여행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그는 일본 여행지 한 곳을 추천해주었다. "very very very good"이라고 하면서, 언젠가 꼭 가보라고 했다. 아마 교토 같은 곳인데, 더 오리지널이라고 했던가, 트래디셔널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더 예스럽고 더 고전적인 교토 같은 곳이라고 했던 설명까지 기억난다. 그 "very very very"의 기묘한 일본식 억양까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했던 그 '도시'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ㄷ이 들어가는 네 글자의 도시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아내가 아직 여자친구였던 시절, 사귄지 두어달쯤 되었을 무렵, 우리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무엇보다 그 도시를 떠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밤을 새우듯이 인터넷에 검색하며 그 도시를 부지런히 뒤졌다. 결국 도시의 이름을 알아냈다. 바로 '다카야마'였다.
아내에게 그 도시를 소개해주니, 아내는 단번에 좋다고 했다. 더불어 다카야마에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라카와고까지 가기로 했다. 아내는 남들이 다 가는 곳은 싫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생전 처음 들어보지만, 그래도 사진만으로도 너무 매혹적인 '눈의 마을' 시라카와고까지 들어가는 일을 무척 설레했다. 우리는 그렇게 부모님 몰래 둘만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오직 눈밖에 없는, 눈으로 뒤덮인 어느 숲속마을을 찾아서 말이다.
나는 두번째 일본여행이었지만, 첫 여행과 같은 계절에, 어찌보면 거의 비슷한 마음으로 일본으로 떠난 셈이었다. 첫 일본여행도 오직 눈덮인 훗카이도를 보겠다고 떠났는데, 두번째 일본여행도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무살 무렵, 당시 가장 마음이나 꿈이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 닮았던, 어쩌면 소울메이트라고 할 법한 친구와 떠났던 '눈 여행' 이후, 십여년만인 서른살 무렵, 여자친구를 만나 다시 '눈 여행'에 마음의 일치를 보았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는 어쩌면 눈이 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 내내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이 수시로 오기도 했던 그 여행에서 유달리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시라카와고의 이름 모를 어느 식당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소바를 먹던 순간, 시라카와고에서 다카야마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들렀던 어느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오래된 카페, 아내는 여행에 지쳐 피곤해서 졸고 있었던 어느 다락방 같은 길가의 2층 카페, 둘이서 숙소에서 나눠준 유카타를 입고 조식을 먹으러 갔던 아침, 그런 순간들이 유달리 기억난다. 그러니까 종일 눈밭을 걷다가, 잠시 들어갔던 곳의 온기, 고요함, 안심해도 좋은 머무름 같은 순간들이 깊이 남아 있다.
어쩌면 눈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그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사실, 눈이 내린다고 뛰어나가면, 눈이 오는 순간을 그렇게 오래 즐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곤 한다. 눈사람 하나 만들고 조금 눈밭을 뛰어다니다보면 금방 지치고 추워진다. 눈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오래 놀 만한 일은 별 게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더군다나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눈과 함께 흙도 다 파헤치느라고 씻길 걱정부터 앞서기도 한다. 그런데도 눈 오는 날, 눈내리는 고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 눈밭을 밟고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묘한 충만함과 따뜻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깥에 눈이 가득 쌓여 있으면, 이상하게 집안은 더 고요하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어릴 적, 스키를 타러 갈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스키를 타고 내려올 때보다도, 중간에 쉬기 위해 휴게실에 들러 어묵을 사먹을 때였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가장 좋은 걸 누리기 위해서는 건너야 하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그것 이후에 오는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후에 오는 여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를 다녀온 이후의 마음, 내가 가장 기다리는 일이 있고 난 뒤의 고요함 같은 것 말이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