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들판에 눈사람 하나가 서있었다. 언제부터 눈사람이 서있었는지, 누가 눈사람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사람은 어째서 자신만 이렇게 덩그러니 홀로 놓여 있는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추운 계절이 계속 이어졌고, 때론 눈이 내렸다. 날이 추워지면 몸이 딱딱한 얼움으로 바뀌기도 하고, 바람이 불면 몸이 조금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다시 눈이 오면 몸에 눈이 붙어 몸집이 커지기도 했다.
눈사람은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일들이 신기하고 좋았다. 세상이 어둡게 변해가며 하늘에 빛의 조각들이 총총 빛나면 날이 밝을 때까지 그 빛들을 헤아려보았다. 그러나 다시 날이 밝아오면, 지평선부터 서서히 푸르게 변해가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빛덩이가 하늘 높이 떠오르면, 몸이 어쩐지 따끈따끈해진다고 느꼈는데, 그러면서 몸의 일부가 조금 녹아내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녹아내리는 느낌, 나른한 느낌도 좋았다.
종종 낙엽이 굴러와 그를 스쳐갔는데, 눈사람은 매번 다른 낙엽이 굴러가는 모양들이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고 매번 달라서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매번 거칠거나 부드러워서 저마다 다른 바람소리도 좋았다. 때로는 주변 들판의 눈이 일부 녹아서 바닥이 드러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눈들 사이로 드러난 갈색 땅의 촉감을 너무나 만져보고 싶기도 했다. 그 사이로 보이곤 했던 초록 잔디의 흔적이나, 부서진 나뭇가지가 하나하나 궁금했다.
눈사람이 무엇보다 좋아한 건 하루 내내 모습을 달리하며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자신의 그림자였다. 늘 비슷한 시간에 나타나서 비슷한 시간에 사라지는 그림자가 항상 반갑기도 했지만,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날 또 그림자가 찾아올 걸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그림자 또한 사랑했다. 눈사람은 차가운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그 속에 섞여 들어오곤 하는 먼 곳의 냄새를 맡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가 왜 자신을 만들었는지, 그 무엇도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존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사람은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사람 곁에 작은 눈사람이 생겼다. 눈사람이 못보던 사이에 누군가 만들거나 놓고 간 것이었는지도 모르고, 다른 이유로 생겨났을지도 몰랐다. 작은 눈사람은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둘은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알지 못했지만, 눈사람은 작은 눈사람이 앞으로 보고 느끼게 될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자신처럼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나가기 시작할테고,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을 사랑할테고, 몸이 녹아내리는 나른함이나 자기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부드러움도 알아가게 될 터였다. 세상 모든 낙엽들이 서로 다른 모양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것이고, 불어오는 바람들의 각기 다른 결과 촉감에 황홀해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가는데, 눈사람은 점점 자신의 몸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날은 예전만큼 춥지 않았고, 들판 주변의 눈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드러난 갈색빛의 땅들이 넓어졌다. 햇살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자기 위에 다시 눈이 내려 쌓이는 일은 없었다. 작은 눈사람은 그런 세상 역시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사람은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자기 주변을 채우고 있던 눈들도 곧 녹아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눈사람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작은 눈사람에게는 이제 막 시작된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눈사람은 다시 생각했다. 자신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렸노라고, 비록 아쉽지만, 자신은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얻는 기쁨을 알 만큼 알았다고 말이다. 그래서 눈사람은 작은 눈사람을 향해 온 몸을 기울였다. 매일 조금씩, 자기의 몸을 작은 눈사람에게 기울여, 눈을 보태주었다. 주변의 눈들이 모두 사라지고, 자신의 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마지막 눈송이 하나를 작은 눈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찾아온 어느 봄날의 오후, 세상 모든 눈이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작은 눈사람만이 남아서 세상의 마지막 햇살을 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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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한
아름다운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ㅠㅠ
세상의 모든 서재
멋진 새해 되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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