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주간, 다섯번째 편지, 엽편소설.

2021.05.06 | 조회 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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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정지우 작가가 매달 '한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소년은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비가 오면, 그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벌써 이 고장에 비가 오지 않은지도 넉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무와 땅은 말라비틀어졌고, 산사태가 일어났고, 농작물도 말라 죽었다. 소년은 계속 꿈꾸었다. 비가 오면, 아주 높은 산봉오리에서부터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서 마른 땅을 모두 적시고, 자신은 그 위에 올라타서 바다까지 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부터 비가 올 때를 대비하여 혼자 탈 수 있는 조각배를 만들고 있었다.

소년의 조각배는 마을회관 뒷편의 버려진 창고에 있었다. 소년은 매일 가서 나무를 깍고, 엮고, 다듬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은 소년이 다른 친구들과 놀기 위해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소녀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다. 소년이 볼 때,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꿈도 없었고, 모험심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그저 코나 흘리면서 공이나 차기 바쁜, 한심한 녀석들이라 생각했다. 비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건 소년 밖에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야말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비는 반드시 올 테니 말이다.

어느 날, 소년은 평소처럼 남들 몰래 잽싸게 마을회관 뒤편의 창고로 향했다. 그런데 창고 근처에서 우는 고양이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엄마를 찾는 아기 고양이의 울음 정도라 생각했다. 그러나 창고에 들어가서 열심히 조각배를 다듬는 와중에도 고양이 울음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소리를 따라가보았더니 한쪽 귀가 반쯤 찢긴 채로 울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고양이는 소년을 보자마자 잽싸게 달려와 몸을 비벼대었다. 소년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바다로의 모험을 준비해야 하는 긴박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비가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년이 하루 중 몰래 쓸 수 있는 시간은 한두시간 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라니! 그것도 다친 고양이라니!

소년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다가,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안아올려 창고로 데리고 들어갔다. 짚풀 더미 위에 고양이를 올려두고, 지하수를 겨우 퍼올려 담아둔 마을회관의 물통에서 몰래 물을 한 바가지 떠왔다. 고양이는 며칠째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다친 귀도 닦아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소년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듯이 작게 울었다. 소년은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한참을 왔다갔다 허둥대다가 말린 쥐포 하나를 구해왔다. 소년의 작은 품에도 들어올 만큼 작은 고양이가, 소년의 작은 입보다도 더 작은 입으로 쥐포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문득, 소년은 자신이 조각배 만드는 일을 잊어 먹었고, 오늘 허락된 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소년은 잽싸게 집으로 뛰어가면서 생각했다. 큰 일 났어! 당장 내일이나 모레쯤 비가 오면 어떡하지? 오늘 짐칸은 다 만들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그러면 내일 돛대를 만들지 못할텐데, 어떡하지? 소년의 마음 속에 초조함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모두 고양이 때문이야! 서둘러 논두렁 위를 걸어가는 소년 곁으로, 말라붙은 논에서 공을 차고 있는 소년들이 서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소년은 세상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평소처럼 일어났는데도 주변이 밝지 않았다. 어른들이 모두 밖으로 나서 있었다. 소년도 밖으로 나가 몰려오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창고로 달려갔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어제 고양이 때문에 짐칸을 다 만들지는 못했지만 괜찮았다. 간단한 짐은 품에 안고 타면 되니까 말이다. 물살이 강하면 굳이 돛대도 필요없을 것이다. 소년은 창고 문을 열어 젖혔다.

소년이 배를 끌고 나가자 고양이가 울어대었다. 고양이는 소년을 보며 같이 있자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년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굳게 마음 먹고 배를 동네의 내천까지 가져갔다. 곧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는 순식간에 굵어지며 온 대지를 적셨다.

소년은 배를 내천에 띄웠다. 금방이라도 물이 차올라 배를 끌고 갈 거라 확신했다. 고양이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계속 울었다. 이윽고 천에 물이 찰랑거릴듯 차올랐다. 소년의 배가 출발했다. 배는 아주 잠시 떠있었다. 그러나 항해는 금방 끝났다. 나무를 묶어둔 밧줄이 풀렸고 배는 뒤집혔다. 소년은 자신의 무릎 정도 깊이밖에 안되는 물에 곧장 빠졌다. 다리가 바위에 크게 긁히며 물을 붉게 물들였다. 비도 그쳤다. 소나기였다. 소년의 꿈은 끝이 났다. 너무 허탈한 나머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잠시 촉촉해졌던 대지는 금방 따가운 햇빛에 다시 데워졌다. 패잔병처럼 둑 위로 올라오는 소년에게 고양이가 다가왔다. 고양이는 생채기가 난 소년의 정강이를 핥아주었다. 약간 고인 물웅덩이 주위로 다른 아이들이 물을 튀기며 뛰어 놀고 있었다. 소년은 계속 자신을 핥아주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에게는 친구가 생겼다. 이상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간절히 떠나길 원하던 마음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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