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주간, 네번째 편지, 에세이.

2021.05.03 | 조회 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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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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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어릴 적부터 나는 지렁이가 비를 좋아한다고 믿었고, 그 사실을 의심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때론 비온 날 이후, 아스팔트 바닥에 널려 있는 지렁이들을 보면서 그 어리석음이 잘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비가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무턱대고 나와버려서 말라 죽는 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런 지렁이들을 피해다니는 데만 집중했다.

지렁이가 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은 정말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렁이가 비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일고여덟살 무렵 이후 이십년은 더 지나서의 일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지구의 자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스쳐지나가듯 나레이션 한 줄이 들렸다. 비가 오면, 지렁이는 숨을 쉬기 위해 땅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었다. 비가 오면, 땅 속에 물이 들어차고, 지렁이는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익사를 피하기 위해 땅으로 나온다. 보통은 비가 그치고 땅이 마르면, 다시 지렁이는 땅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스팔트까지 나온 지렁이는 애꿎은 아스팔트에 머리만 박다가 결국 말라죽고 만다.

그러니까 지렁이의 죽음은 물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익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렁이가 어리석기 때문도 아니었다. 자연의 흙이었다면 죽을 리 없을 지렁이가 인간이 만든 아스팔트 때문에 말라 죽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충격적이었다. 탐욕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으려다가 죽는다는 것, 이 사실이 묘하게 뼈아팠다. 나는 지렁이를 오해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나쁘게 오해하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탐욕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십대 내내, 거의 그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며, 결국 이기심과 탐욕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는 식으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나에게 접근하거나 나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에 관해서도, 나에게 얻을 게 있으니 그러겠지, 나에게 기대하는 이익이 있으니 그럴테지, 하는 생각을 조금은 가졌던 것 같다. 아마 이십대에 거쳤던 몇 번의 '이용당함' 같은 것도 그런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니 지렁이를 보면서도, 먼저 지렁이의 탐욕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대략 그 '지렁이의 죽음'에 대해 깨달을 무렵부터, 아마도 그 전후로 대략 일이년 정도의 시간에, 나는 사람과 사람의 문제라는 게 '이익'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는 걸 조금씩 느끼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 이익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부터 그랬다. 누군가에 대한 호감은 당연히 이익과 관련없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꼭 무슨 이익을 주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럴진대, 어째서 타인들을 모두 '자기 이익'으로만 움직이는 기계처럼 당연히 여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특히, 내게도 순수한 선의로 대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 둘 겪으면서, 그런 선입관도 점점 무너져갔다.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는, 타인들의 이기심을 들여다보는 일들이 줄어갔던 것 같다. 물론, 세상에는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해 나를 이용하거나, 그 때문에 나와 친해지려고 하고, 그를 위해서만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무렵'부터 나는 그런 사람을 점점 모르게 되어갔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나는 그의 이기심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저 사람의 보다 순수한 선의나 호의를 더 믿게 되었다. 그것은 지렁이가 탐욕 때문에 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된 일과 분명한 접점이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 혹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들이 조금씩 채워질수록, 어떤 선입관은 서서히 밀려나가거나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의 다른 측면을 보는 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또다른 시야를 가지는 일이었고, 삶을 다소 다르게 대할 줄도 알게 되어가는 일이었다. 생각건대, 그것은 나쁜 일이라기 보다는 좋은 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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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ver 3 years 전

    저한테 이 글 베스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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