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 아이와 길을 걸을 때면 아스팔트 바닥을 지나가는 지렁이를 구해준다. 주위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서, 지렁이를 막대기 위에 태우고, 주위 화단에 옮겨 넣는다. 아이는 그 과정을 너무 흥미로워하고 재밌어 한다. 그러면서 “지렁이는 착하니까 꼭 구해줘야 돼.”하고 말한다. 어쩐지 아이에게는 지렁이 하나에조차 베푸는 선한 마음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이전까지 나는 지렁이를 구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 처음으로, 지렁이를 구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 원래부터 선한 마음 같은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성선설 같은 것에 대한 확신은 없다. 특히, 내가 혼자 있을 때, 한 번도 지렁이를 구해준 적 없다는 사실은 내가 단지 선한 마음을 흉내낼 뿐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지렁이를 구하고, 고양이에게 잘 대해주고, 무당벌레를 살려주고, 참새에게 과자를 나누어준다. 그러면 아이가 참으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선함에 대해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부모가 된다는 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없는 것을 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는 넘쳐나는 다정함, 친절함, 선함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에게는 세상에 그런 다정함, 친절함, 선함, 그리고 사랑, 배려, 다투지 않고자 하는 마음,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 같은 것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마음들을 보여주려 한다. 아이가 보고 있기 때문에,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양 행동하고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의심하는 편이다. 스스로가 진심으로 선하다고 믿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스스로가 이기적이지 않다거나, 아주 이타적이라거나, 정의롭다고 진심으로 믿어본 적도 별로 없는 듯하다. 오히려 내가 너무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라고 느낄 때가 더 많고, 아주 순수한 마음이 존재한다고 느낄 때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생명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순수한 선의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선역을 연기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세상의 좋은 일이란 모두 그런 의심 속에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너무도 순수한 확신으로 세상의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 보다는, 그저 의심 가득한 마음을 품고서, 그렇지만 그 마음과 무관하게, 그저 해버리는 어떤 일들이 세상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는가? 얼마나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가져야 하는가? 가식이나 위선은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가? 어차피 대부분 말라 죽을 지렁이이기 때문에, 그냥 밟고 지나가는 것이 솔직하고 진실된 마음인가? 결국에는 그런 질문들을 품고서, 그냥 지렁이 한 마리 구해내는 그런 일이, 그런 일을 보고 자란 아이가, 자신의 삶도, 주변의 삶도, 조금은 더 낫게 만들 거라는 허무맹랑한 희망 같은 걸 가져보는 것이다. 그렇게 비온 다음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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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주간'을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다음 주간은 무엇으로 할지 고민 중입니다. 부족한 여력일지라도, 마음 한 구석이 빛나서 글을 쓰고 싶게 하는 그런 소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혹시라도 제안하고 싶은 주간이 있다면, 언제든 부탁드리겠습니다. 불성실한 우체부 기다려주셔서 늘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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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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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작가님의 글은 항상 제 마음에 위안을 가져다 줍니다. 괜찮다라는 생각을 오늘도 전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 또한 부모님께 저의 없는 모습까지도 전부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뭉클해지는 오후네요.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서재
다행이네요 :)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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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글이 생각나는 글이예요. 아이에게는 늘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인가봐요. '의심하면서도 보여주려는 의지'를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절대선이 아니면 어떤가요, 아마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작가님의 온기 전달받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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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면서 참 배우는 것이 많은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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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두고두고 꺼내보고싶은 글이 있다. 가령, 가뭄이 인 마음을 촉촉하게 적혀주는 그런글. 작가님의 글은 나에게 그렇다. 언제 다시 꺼내봐도 변함 없이 위로와 따뜻함은 준다. 이른 아침부터 비에 쫄딱 젖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의 주간이 유독 깊은 울림을 준다. 내 일상을 차근 차근 관찰하게 해준다고나 할까.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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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리뷰 감사드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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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to134340
비의 주간이 끝이군요. 이번에 처음으로 작가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생각하지 않으려도 생각나게 하는 글은 도대체..ㅎㅎ 늘 읽을 때 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에요. 잘 보고 갑니다!
세상의 모든 서재
두고두고 생각나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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