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여동생이 “엄마, 하늘 좀 봐. 참 예뻐.”하는 말에, 어머니가 놀랐다고 한 적이 있다. 나와 여동생은 차를 타고 갈 때면, 늘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 모양을 구경하거나, 하늘의 색깔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어머니는 여동생이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하늘을 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현실의 여러 의무들을 좇고, 책임지고, 그에 시달리느라, 하늘을 볼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삶에 하늘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시간 자체가 없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리 바쁜 출퇴근길이어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예쁘다, 하고 생각할 시간 정도는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때로 그런 여유조차 없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하늘의 예쁜 구름에도 그저 무신경한 마음이 들고, 노을의 눈부신 색채도 그저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세상을 만나지만, 반대로 마음이 세상을 가로막아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차단’되는 마음이라는 것은, 어째서인지 주로 어른의 마음인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취향을 계발하기도 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았던 많은 마음들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듯하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마음에 들어찬 어떤 현실의 요소들은 우리 마음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것들을 딱딱하게 만들어버리곤 할 것이다.
하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로 열렸다는 뜻일 것이다. 마음에 하늘이 들어올 자리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하늘을 사랑하는 방법을 때로 잃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출퇴근길의 하늘이 아름다워 넋놓고 구름을 바라보곤 하던 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처럼, 구름을 보고 강아지를 닮았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놀랄 때가 있다. 세상은 여기 놓여 있는데, 어째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걸까, 의문이 들곤 한다.
어쩌면 하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은 삶에서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늘을 보고 사랑할 여지가 있다면, 나의 마음에는 세상을 담을 자리가 남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오늘의 하늘에서 도무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오늘의 하늘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면, 이제 내 마음에 어떤 자리를 애써 만들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설령 하늘 같은 것을 사랑한다고 한들, 딱히 이익이 되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쓸모없는 것을 사랑할 마음이라는 게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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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늘의 주간’을 시작합니다. 정말이지 불성실한 우편 배달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종종 하늘을 생각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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