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주간, 여덟번째 편지, 에세이.

2021.02.14 | 조회 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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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오래된 동영상이 하나 있다. 영상은 내가 중학생 3학년일 때 찍은 것인데, 그 속에는 어린 여동생과 나의 모습이 담겨 있다. 눈이 잘 오지 않는 부산에 모처럼 눈이 쏟아져서, 창문을 열면, 한뼘쯤 되는 눈이 쌓인 채 고스란히 창문을 연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무척 다정하게 눈 쌓인 걸 보라며 깔깔대고 있었고, 여동생도 순수하게 웃으며 나에게 눈 쌓인 걸 보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영상이 있는 잠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 날의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그 영상을 너무 오랜만에, 거의 10년만에 발견하고는, 이런 날이 있었던가 싶었다. 당시 살던 집에서의 느낌은 기억이 났지만, 그날은 생각나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내가 여동생을 다정하게 불렀구나, 하는 게 너무 놀라워서, 그 영상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여동생을 사랑하며 챙겼고, 여동생도 더 순수하고 즐겁게 웃으며 나를 따르던 시절이었다.

여동생과 내가 유독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세한 날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다. 또 나이가 들면서,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면서 여동생과의 사이도 꼭 예전같지만은 않아졌다. 여전히 사이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이루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영상 하나는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데, 거의 그 영상이 유일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영상만이 기억해내게 할 수 있는 하루, 시절, 느낌이 분명히 있다. 우연히 컴퓨터 구석에서 발견된 파일 하나, 딱 하나밖에 없는 그 시절 영상 하나만이 하는 역할이 있다.

한편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잃어버렸나 싶은 생각도 든다. '눈'에 대한 글을 써보려 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 눈에 대한 기억들은 거의 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 날들의 구체적인 마음들, 느낌들, 시야들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걸 느낀다. 나의 과거에 대해, 나는 늘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제 어떤 날들은 영영 닿을 수 없는 곳들로 멀어져 사라져 버렸다는 걸 느낀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오직 나만 알고 있었을 어떤 나날들을 참으로 많이 잃으면서 살아왔구나, 하는 걸 새삼 느낀다.

이제 눈에 대해서도 더 이상 쓸 글들이 없다고 느낀다. 나에게 눈 내리던 그 많은 날들, 내가 그토록 사랑했거나 기억하고 싶어했던 많은 시간들도 대부분은 저물어 어딘가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눈이 오던 어떤 날을 참으로 사랑했고, 그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로써 이 삶을 사랑했다는 마음 만큼은 내 안에 쌓이고 쌓여 나를 이루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망각의 나날들을, 마음에 켜켜이 쌓아간다. 그런 마음이 오늘을 살게 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

눈의 주간도 이제 마무리할까 합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눈의 주간' 어떠셨는지 메일이나 댓글로 남겨주세요 :)

나눔글 두 편을 보내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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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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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의 프로필 이미지

    mo

    0
    almost 5 years 전

    저도 최근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잊고 있었던 추억들을 가족으로부터 들으면서 그때 일이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란 존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억을 함께 공유하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걸 새삼 알게 됐어요. 그때는 특별하다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하나의 씨앗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한 기억의 줄기가 되는 걸 보면, 오늘 하루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ㄴ 답글 (1)
  • 보배의 프로필 이미지

    보배

    0
    almost 5 years 전

    보내주신 눈의 주간 잘 읽었습니다. :) 덕분에 눈으로 충만해진 겨울을 보냈습니다. 다음 주간의 소재가 궁금합니다!

    ㄴ 답글 (1)
  • 사라의 프로필 이미지

    사라

    0
    almost 5 years 전

    눈의 세상이 끝나는 듯 아쉬워요.. 마침 봄을 알리는 비가 내려요. 쓸쓸하고 설레는 이 양가의 감정에서 나눔글 보내주시면 조금더 눈의 주간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이 따사롭고 다정한 눈.

    ㄴ 답글 (1)
  • 민정의 프로필 이미지

    민정

    0
    almost 5 years 전

    그 아름다운 눈들이 쌓여 지금의 작가님을 만드셨음을, 깨달아요 :) 눈의 주간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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