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22. 복학생(8)

A는 온 세상이 분홍색이라는데요. 이유가 무엇일지?🌞

2022.11.16 | 조회 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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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B는 현재, 자취방에 홀로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는 한 손을 반으로 접어 머리를 괴고 나머지 한 손은 껄렁하게 핸드폰을 든 채로 게임을 하는 중이다. 한동안 광고가 난무하던 바로 그 게임이다. 이 게임 속에서만큼은 B가 황제로 살 수 있다. B는 가슴이 큰 후궁의 윗옷을 벗겨보려다 실패하곤 혼잣말로 욕을 뇌까렸다. 게임 주제에, 또 현질을 해야 가능한 거임? , XX같네. 한숨을 쉰 B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보았다. 곰팡이 핀 천장이 불룩했다. 아, X같은 인생. B는 제 통장의 잔액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269원. 어떻게 천 원도 없지? 돈을 어디다 다 썼지? B는 머리를 굴렸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음식점은 힘들어서 싫고, 카페는 메뉴가 복잡해서 싫고, 편의점은 시급이 짜서 싫었다. 이 고급 인력이 그런 돈을 받고 일할 수는 없으니까.

 

얼마 전 B에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술을 사주던 A가 떠올랐다. 둘은 중국집에 가 간짜장, 삼선짬뽕, 탕수육 중자를 먹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짬뽕에 든 오징어를 집어 먹던 B는 A가 나 연주랑 사귀기로 함, 이라고 말하자 오징어를 뱉을 뻔 했다. 벙 찐 B의 얼굴을 본 A가 나 영화 보다가 연주 손도 잡았어. 아, 연주가 내 손을 잡은 건가? 후훗. 평소 같았으면 ‘후훗’이라고 소리 내서 웃는 것마저 찌질해 보였을 텐데, B는 순간 A에게 정말 여자들이 좋아할 매력이 있는 걸까 의심이 되기까지 했다. 살이 좀 빠졌나? 피부가 좋아졌나?

 

B는 한숨을 푹 쉬고 유튜브를 켰다. B가 좋아하는 BJ가 어제 진행한 라이브 방송을 놓친 탓에, 오늘 올라온 것을 보아야 했다. 하얀 피부에 애교도 많고 가슴도 크고 완전히 자신의 이상형인 BJ를 보면서 BA가 고작 한연주에게 발목이 잡히는 구나, 생각하고 혀를 찼다.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그 시각 A는 연주와 함께 공원을 다섯 바퀴째 걷고 있었다. 좀체 용기가 나지 않아서 A는 연주와 어색하게 웃으며 공원을 돌았다. 연주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는 듯, 해맑은 얼굴로 연못 근처의 정자를 가리켰다.

 

- 우리 저기 앉았다 갈래요?

- 그래, 그러자.

 

A는 연주의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함께 이끼 낀 연못을 보던 둘은 서로를 빠뜨린다는 둥 장난을 쳤고, A는 무심한 듯 연주에게 고백을 했다. 연주야, 우리 사귀자. 오늘부터 1? 받아줄 거지? 연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A는 마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애를 하면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더니, 정말 그런 필터를 눈에 씌운 듯 세상이 온통 빛났다. 그들은 다소 어색해진 모습으로 정자에서 내려와 다시 산책길을 걸었다.

 

그는 고민했다. 내 손등에 스치는 연주의 손을 잡을까, 말까. 이번에도 연주가 빨랐다. 연주가 먼저 A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A는 가슴이 벅찼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이런 순간이? A는 슬쩍 연주를 내려다보았다. 빨개진 볼이 사랑스러웠다. A는 연주와 함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평소 양은 적고 느끼한데다 가격까지 비싸서 여자 선배들을 뜯어먹을 때나 가본 곳이었다. 사랑의 힘이 이런 거지, A는 생각했다. 연주를 위해 기꺼이 한 접시 당 만 원이 훌쩍 넘는 서양 국수를 먹으러 온 자신에게 그는 도취되었다.

 

그들은 빠네 파스타, 마르게리따 피자, 카프레제 샐러드를 시켰다. 식전 빵과 크림수프로 속을 채우고 카프레제 샐러드를 먹었다. A는 채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발사믹 드레싱이 뿌려진 치즈와 토마토를 중점적으로 먹었다. 다행히 연주는 채소를 좋아하는지 별 내색 없이 드레싱이 약간 묻은 양상추를 아삭 아삭 먹었다. 햄스터 같아 귀여웠다. 양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A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분식이나 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 볼까?

 

생각도 잠시 빠네 파스타와 마르게리따 피자가 등장하자 A는 곧장 피자를 공략했다. A의 취향이 아니었다. 파스타는 느끼했고 피자는 오묘한 맛이었다. 거기다 화덕 피자라서 배가 부른 느낌도 들지 않았다. A는 어느 새 빈 접시를 아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별로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심지어 피자의 모서리 부분은 딱딱하기만 하지 별 맛도 없었다. 앞에 놓인 다섯 개의 모서리를 보고 쓴 웃음이 나왔다. 연주는 아직도 피자를 한 조각째 먹고 있었다. 양이 적은 건지, 먹는 속도가 느린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그는 내심 답답했지만 티내지 않고 연주를 보았다. 좋아하는 먹방 BJ에게 거금을 후원하고 받은 리액션보다, 천천히 오물거리는 연주의 입술을 보고 있는 게 훨씬 행복하고 뿌듯했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하게 된 건지. A는 새삼 연애를 시작한 자기 자신이 대견했다.

 

 

 

 

 

 

당신의 심심한 수요일에 까먹을,

줄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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