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귤레터] 34. 청첩장

오늘은 소설입니다! 이 흰 봉투의 주인은?💌

2023.04.07 | 조회 1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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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귤

귤처럼 까먹는 줄글을 보내드립니다.

주위가 조용하다. 이상했다. 생활 소음이라곤 죄다 사라져버린 것 같은 고요함. 천천히 핸드폰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때였다. 한 끼는 건너 뛰었군. 그럼에도 배가 고프지 않아 조금 더 누워 있기로 했다. 오랜만이었다. 주말이 아닌 날 이 시간까지 침대에서 한가로이 쉬는 것이. 밀린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답장을 보내는데 하나같이 부럽다,라는 반응이 재빠르게 되돌아왔다. 부러운가? 얼마 전 바꾼 침구가 기분 좋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괜히 다리를 바르작 대다 보니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좋긴 하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둔 건 조금 바보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 사람도 싫고 업무에 흥미도 없었지만 적어도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던 안정된 직장이었는데.

 

정해진 수순처럼 그를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그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무신경하게 내뱉는 말에 곤두선 신경을 삽시간에 토닥여주는 힘을 가진 사람.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따스하게 나를 바라보던 사람. 파티션 너머로 전해지는 눈빛이 열 마디 말보다 더 힘이 됐다. 가끔 남들의 눈을 피해 자투리 시간을 서로에게 온전히 써보기도 했다. 간단한 점심 식사 후 오래오래 걷기.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 카페에서 커피 마시기. 매번 속 깊은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어도 우리는 금세 서로를 이해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언니, 그 사람 결혼한대. 듣자마자 부정했다. 사고를 담당하는 기관이 그 말을 튕겨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어정쩡한 대답을 늘어놓자 한층 더 안쓰러운 눈빛이 돌아왔다. 언니도 몰랐구나. 자리로 돌아오니 흰 봉투가 수줍게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먹고 들어온 참이었다. 친구에게 그 사람 이야기를 했다. 곧 사귀겠네,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해, 하는 말을 들으며 아무 걱정 없이 웃었더랬다. 나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해. 내 말에 친구가 환히 웃었다. 그랬는데.

 

아름다운 봄날, 귀한 분들을 모시고 평생의 약속을 하려 합니다

 

문구는 직접 썼을까. 지극히 그 사람 다운 말이다. 문구 아래 찍한 그의 이름이 생경했다. 처음 보는 것처럼.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기분 탓일까. 내키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웃어야 하는데. 마음처럼 입꼬리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대신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붕 떠서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일들을. 이따금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Unsplash의 Ambitious Creative - Rick Barrett
Unsplash의 Ambitious Creative - Rick Barrett

집에 돌아오는 길, 술집에 들러 처음으로 혼술을 했다. 칵테일을 시켜놓고 우아하게 몇 모금 홀짝이다가 종래에는 우느라 반도 못 마시고 얼음이 다 녹아버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두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삽시간에 눈두덩이 부어올랐다. 묵직해진 눈꺼풀이 조금 우스워 미소를 지었다. 값을 치르고 집으로 향했다.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무어라고 장문의 답장이 왔는데 읽지 않고 지웠다. 어차피 기름칠 덜 된 부속품에 불과한 자리였다. 언제든 누구든 들어와 채울 수 있는 자리. 조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 사표를 제출하니 인사팀에서 절차대로 진행해 주었다. 일주일간의 텀이 있었다.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느라 바빴다. 시간을 쪼개 이력서를 쓰고, 십수 군데에 보내고, 몇 군데 정도는 면접을 보러 다녔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다들 어리둥절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쉬지도 않고 일해서 휴가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 딱 삼 일을 활용해 해야 할 모든 일을 처리했다. 남은 이삼일은 여느 때처럼 출근하여 인수인계 서류를 만들었다.

 

매번 그의 눈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결재를 맡는 내 뒤통수에, 인수인계 서류를 만드는 내 옆모습에, 탕비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그의 시선이 지치지도 않고 달라붙었다. 마지막 날에는 내가 탕비실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부리나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정작 둘이 있게 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미 석 잔이나 마신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X 씨가 없으면 허전할 거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혼자 몇 번이고 연습해본 듯한.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탕비실을 나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리니 또 눈물이 났다. 그와는 정말 그렇게 끝이었다. 내가 서러웠던 건 잠시나마 우리가 정말 서로의 안식처일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그토록 스며들듯 애정을 느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나의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보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내가 서로의 재앙일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토록 서러웠다.

 

언니, 괜찮아요? 그분은 안색이 안 좋아요. 새신랑은 무슨, 매일 울상으로 다녀요.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오래오래 읽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지끈거리는 통각을 느껴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오래 아플 거다. 그도 그러하길. 바람이 불어 커튼이 살랑, 들썩였다.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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