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떻게, 시간이 되겠어요?
날선 눈빛이 공들인 속눈썹 끝에 들러붙는다. 분명 어제 퇴근 무렵 갑작스럽게 술 한 잔 하자는 말에 무심코 한 대답 때문일 것이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살며시 웃는 이 팀장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다.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응시하자, 이 팀장의 눈에 알 수 없는 섬광이 스친다.
속눈썹 펌, 하루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오늘은 시간이 되겠네?
이 팀장이 조곤조곤할 말투로 맹렬하게 밀어붙이자 나는 대책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아, 또다. 이런 식으로 일 주일에 두 번 이상은 휘말리고 만다. 맹하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이 팀장이 말 없이 눈썹을 들썩이며 대답을 종용한다.
어... 네.
그래요, 그럼 끝나고 기다려요. 같이 나가게.
이 팀장이 제 자리로 돌아가자 김 대리가 대놓고 몸을 돌려 나를 본다. 애써 피해도 김 대리의 시선 또한 집요하다. 그런 김 대리를 이 팀장이 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는데, 달랑 세 명 뿐인 부서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게 무슨 막장 드라마냐면서 도망치라고 하지만, 나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직장을 대뜸 그만둘 정도로 담대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모른 체 능글맞게 넘기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이럴 때면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한다. 바로 도망치는 것.
화장실에 들어와 뜨거워진 이마를 벽에 댔다. 하... 나도 모르게 짙은 한숨이 샜다.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오는지 유리문이 슥 열리는 소리가 난다. 벽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았다. 20분은 있다가 나가야지.
오늘도 에이스 팀은 분위기 살벌하던데?
야, 이 팀장이랑 김 대리는 깨진 지가 언젠데 애꿎은 신입한테 지랄이래?
몰라~ 이번 신입이 또 유난히 무른가봐? 그 난리에도 안 도망가고.
근데 그 둘이 진짜로 사귀었대?
그렇겠지, 뭐. 안 그럼 그렇게까지 서로 으르렁거릴 이유가 있나?
밖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감았던 눈이 번쩍 뜨인다. 뭐? 둘이 사귀었었다고? 그렇다면, 저 대화 조각들로 유추해 보았을 때, 서로 미련이나 분노가 남아 보란 듯이 나를 사이에 두고 기싸움을 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친구들이 사내연애를 조심하라며 김 대리를 멀리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넘겨짚은 것 같아서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밖에서 들릴까 한숨과 웃음을 겨우 삼킨다. 나는 또, 김 대리가 왜 자꾸 나를 쳐다보나 했더니. 이 과장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한 가지 걱정은 던 셈이다.
젖은 손을 탈탈 털며 화장실을 나섰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하기로 했다. 김 대리가 내게 흑심이 없다는 사실만 해도 어딘가 싶다. 우리 팀은 고작 셋 뿐이지만 이 팀장과 김 대리의 업무 능력이 워낙 뛰어나 '에이스 팀'이라고 불린다. 둘이서는 오랫동안 일을 해 왔을테니 왜 으르렁거릴까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 아마도 내 눈치가 느려서 몰랐던 것일 테다. 아니, 애초에 서로를 보는 시선에 넘실거리는 살기 때문에 언젠가는 서로를 좋아했을 거라는 짐작도 차마 못 했다. 그렇게 진심으로 싫어질 수가 있나?
연애를 해 봤어야 알지,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한숨소리에 이 팀장과 김 대리의 시선이 단박에 나에게 꽂힌다. 이 정도면 파티션이 없는 것 아니야?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웃었다. 김 대리가 막 입을 열려는 새를 비집고 이 팀장이 날카롭게 붇는다.
예인 씨, 왜 한숨이야? 혹시 피곤하니?
아... 아뇨.
일을 열심히 안 했나보네.
이 팀장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잠시 주춤거리자 김 대리가 재빨리 말꼬리를 문다.
팀장님은 참, 말씀을 서운하게 하셔. 예인 씨가 꾀부리는 것 보셨어요?
김 대리의 말에 이 팀장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운 얼굴로 김 대리를 응시한다. 아까 화장실에서 들은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이번 신입이 또 유난히 무른가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자각한 내 모습이 초라하다. 이 둘 사이에 껴서 치이기나 하고, 바보 같이.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앙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깔았는데도 내 뺨에 와 닿는 이 팀장의 시선이 느껴진다.
...예인 씨.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하네.
네?
술은 다음에. 대신 내가 데려다줄게.
아...
거절은 하지 마. 준비하고 내려 와, 나머진 김 대리가 마무리할 거니까.
미리 써둔 대사처럼 쉼 없이 말하고 떠나는 이 팀장의 뒤통수만 멍하니 보다가 김 대리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든다.
원래는 오피스 스릴러를 꿈 꿨는데...
판타지 같지만 또 현실적인(?) 불편한 소재가 되었네요.
상상만 해도...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ㅎ
예인 씨, 화이팅입니다.
구독자분들이 힘나는 월요일이 되시길 바라는
줄귤레터🍊
의견을 남겨주세요